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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싱가포르

싱가폴과 자카르타(끝)

by 장돌뱅이. 2013. 10. 19.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다. 인도네시아 그리고 자카르타가 내게 그렇다.
내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고, 처음으로 살아본 도시이기 때문이다.
월급쟁이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이라는 것이 제한되기 마련이지만, 20년 전
나는 한국 근무와 인도네시아 근무를 사이에 두고 나름 심사숙고를 거듭 하다가
가족과 이곳에서 생활해 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인도네시아의
공용어가 영어일 것이라고 추측을 할 정도로 사전 지식은 무지했다. 몇 달간의 생소한
언어(라기 보다는 몇 개의 단어) 익히기를 유일한 사전 준비로 비행기에 올랐다.

자카르타 외곽의 수카르노하타 SOEKARNO -HATTA 공항에 비행기가 내릴 때
창을 통해 보이던 탁한 바다와 점점이 떠 있던 검은 배, 그리고 초록의 수풀 사이에
들어선 마을의 붉은 기와집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첫 외국생활에 대한 설레는
기대와 함께 가족과 보내야 할 생활이 주는 부담도 묵직했다. 자카르타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대체적으로 좋은 기억이 되었다.

그때 인도네시아를 결정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면 그 이후의
내 삶의 행로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앞날은 늘 예측할 수 없어
신비로운 거니까. 하지만 인도네시아에 놓은 한 수는 여러 가지 의미로
내 삶의 중요 맥점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자카르타는 자주 가는 출장지로 변했다.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고 선회를 할 때마다 나는 그 첫 경험을
추억한다. 그래서 자카르타행 비행기만큼은 늘 창가 좌석을 선호한다.

싱가폴과 자카르타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싱가폴 시간이 앞서가다 보니
12시 반 경에 출발해 두 시간을 날아갔는데도 아직 오후 1시를 좀 넘긴 시간이라
오후 시간이 여유로웠다. 미국에 주재한 뒤로는 실로 오래간만에 가는 자카르타였다.
공항에서 자카르타롤 들어가는 길은 유료 고속도로 JALAN TOL 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막혔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못 보던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이 가끔씩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의 중심에 있는  그랜드 하이얏트 로비에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R을 만났다. 
그는 예전 이곳에서 근무할 때 인도네시아 현지 합자사의 임원으로 서열로 보면 나의
상관이었다. 자카르타와 함께 내겐 추억의 인물이다. 지금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부인을 대동해서 식당 뽄독라구나 PONDOK LAGUNA로
갔다. 잘란 바뚜뚤리스 JALAN BATU TULIS에 있는 이 식당 역시 우리가 그 옛날 자주
이용하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인도네시아 음식 - 특히 씨푸드 전문점이다.
R은 식당 입구에 우리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번 여행 중 남은 유일한 유일한 사진이었다.

식당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였다. 자카르타 시내의 온갖 이름난 호텔들이 텅텅 비던
97년의 IMF 경제 위기 시절에도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니 요즈음이야 당연하겠다.
옛날처럼 생선튀김인 구라메고렝 GURAME GORENG과 삼발 SAMBAL 소스,
그리고 깡꿍 KANGGUNG (태국의 팍붕)을 주문했다. 거기에 R이 추천하는 게요리와
두부튀김을 더 했다. 처음 이 식당에 왔을 때 손으로 깡꿍과 밥을 집어 먹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 멈칫 했던 기억이 있다. 군대 이야기를 하는 예비군들처럼 우리는 지난 일들을
끄집어내 화제에 올렸다. 오래간만에 돌아보는 옛 이야기는 식탁을 한결 더 푸짐하게 만들었다.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 수 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 되어 도도히 흐른다.
                     - 천상병의 시, “회상2” -

남에게 선물하기는 뭣하지만 본인이 쓰기에는 더 없이 편리한 물건이 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인도네시아의 바띡 BATIK 이 그렇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전통 바띡은 인니 특유의 얇은 천에 손으로 갖가지 문양을 넣어 염색을 하기
때문에 가격이 엄청나게 높다. 중간대 가격의 상표인 바띡끄리스 BATIK KERIS도
한번에 여러 개 사기에는 가격이 만만찮다.

그러나 아내가 선호하는 바띡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으로 찍어내는 싸구려
기계 바띡이다. 우리끼리는 그것을 '시장표'나 '공장표'로 부른다. 인도네시아
살 때에 알게 되어 집안에서만 입었는데 얇고 가벼운 데다가 감촉이 하늘하늘하여
더운 날씨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내는 귀국길에 그것을 가져다가 (남들에게는 선물로
주기가 뭣한 싸구려라)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모두들 여름에는
입기에는 더 없이 좋다며 만족해하였다. 특히 더위를 많이 타시는 장모님은 사철 바띡만
입으실 정도로 좋아하셨다.

아내가 이번에 나와 함께 자카르타에 온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바로 그 바띡 때문이다.
그동안은 발리여행이나 자카르타 출장 기회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미국에 주재한 최근
수 년 동안은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R과 그의 부인에게 저녁을 먹으며 시장표 바띡에 대해 물었다. 아내의 예전 단골 가게가
없어진 탓이다. 그러나 그녀 기준의 ‘싸다’는 의미는 우리와 너무 달랐다. 상류층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제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비싼 수제 바띡만을 입어왔던 것이다.
그녀의 기준으로 알려주는 ‘싼 바띡’은 고급쇼핑몰인 PLAZA INDONESIA의 바띡끄리스를
비롯해 SARINAH 백화점, 가장 최근에 생긴 쇼핑몰 GRAND INDONESIA 등이었으나
모두 우리 예산을 넘는 곳들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바띡을 파는 곳은 한 식당의 현지인 직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건물 속으로 옮겨온 현지인들의 시장인 THAMRIN CITY JACC에 있는 바띡 누산따라
BATIK NUSANTARA 였다. 일층과 지하층 거의 전부가 공장표 바띡으로 가득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가도 될 가까운 곳이었다. 아내는 만원에 3-4개 하는 바띡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와서 침대 위에 늘어놓고 지극해 만족해하였다. 그러다간 아직 미진함이 남았는지
플라자 인도네시아로 가 바띡끄리스도 몇 점 더 사다가 보탰다.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냐고
구시렁거렸지만 아내는 개의치 않고 씩씩했다. 그렇게 자카르타에서 보낸 짧은 이틀과 함께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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