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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4

오래된 송년회 코로나 때문에 뜸했던 연말 모임이 올해는 부쩍 늘었다. 오래 만남을 가져온 동창 부부들과의 송년회도 2년의 공백 끝에 다시 가질 수 있었다. 관계에서 오래되었다는 것은 시시콜콜한 것을 서로 많이 알고 있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런 '시시콜콜함'이 주는 아기자기한 재미와 편안함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잘한 이야기나 일상의 사진 따위를 단톡방에 자주 올리는 이유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을 보고 식사를 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송년 모임이었지만 이번엔 계속 한 자세로 앉아 있기 힘든 아내의 허리를 고려하여 식사 전 경의선 숲길을 걷는 것으로 대체했다. 아내가 모임 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 것은 100여 일 만에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일상에서 사라져야 비로소 아내의 허리는 완전히 .. 2022. 12. 9.
나의 수타사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이나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 -김사인, 「장마」- 수타사는 강원도 홍천에 있다. 공작산 아래 수타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절이다. 아내가 결혼 전 근무하던 학교가 그곳에서 멀지 않다. 그래서인지 난 수타사 하면 그 시절의 아내를 떠올린다. 어제 저녁엔 지난 앨범에서 교정 화단에 선 앳된 모습의 아내를 보.. 2020. 7. 14.
내가 읽은 쉬운 시 74 - 김사인의「바짝 붙어서다」 언제부터인가 도시의 골목길에서 자주 보게 되는, 헌 신문지와 종이 상자를 모으는, 졸아든 듯 작은 체구와 굽은 허리, 흰 머리의 고랑진 얼굴. 누군가 그들이 모으는 폐지의 가격이 국제 유가의 변동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우리의 세상을 엮고 있는 어떤 촘촘한 그물망을 생각해 보았다. 한겨울의 칼바람을 마주하며 밀차를 잡고 걸어야 하는 그들의 시린 발걸음이 세상의 법과 제도와 경제와 정치가 만든 그 촘촘한 그물의 한 매듭이라면 한결 가뿐하게 집으로 돌아갔을 한 젋은 금수저에게 주어진 성긴 매듭과 똑같은 씨줄과 날줄로 엮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두 매듭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상상으로도 가늠하기 힘들만큼 멀어 보인다. 입춘이지만 유난스레 추웠던 하루가 꼭 날씨 탓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굽은 허리.. 2018. 2. 6.
내가 읽은 쉬운 시 33 - 김사인의「주왕산에서」 여의도에서 일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의 가을이 길끝까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아!..... '햇빛은 어찌나 눈이 부신지 나는 하마트면 눈물 흘릴 뻔했네' 조동진의 노래 "아침기차" 뒷소절만 반복하여 흥얼거리며 잠시 여의도 공원의 숲길을 걸어보았습니다.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면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 2015.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