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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3

내 별명은 '버어마' 1971년 5월 '제1회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일명 '박스컵(Park's Cup) 결승전이 열렸다. 상대는 당시 아시아 최강 중의 하나인 버어마였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내가 그걸 기억하는 건 그때가 중간고사 시험 중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축구를 볼 수 없어 시험공부를 핑계로 친구집으로 가서 보았다. 축구광이었던 나는 부모가 집을 비운다는 친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공부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흑백텔레비전의 화면 속에 눈을 고정한 채 슛이 빗나갈 때마다 안타까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며칠 뒤 재경기에서도 무승부여서 결국 공동 우승으로 끝났다. 그 뒤로도 몇 번 버어마는 우리와 맞붙었고 자주 우리가 졌다. 얼굴이 검은 탓에 초등학교 내내 나의.. 2023. 12. 3.
작고 작은 이 세상 2011년 12월 뉴질랜드를 여행하다가 위험천만한 교통사고를 경험했다. 인가가 없는 외딴 도로에서였다. 그때 뉴질랜드 사람들로부터 두 번의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당시의 여행기로 대신한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911 ) 그 일로 나는 두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에서 말짱하게 살아남은 건 신이 베풀어준 행운 덕분이었으므로 남은 삶은 그 분의 뜻에 합당하게 즐겁게 살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행복은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할 수 있겠다. 가히 '거룩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다짐의 강도는 물에 풀린 물감처럼 나날이 희미해져가고 돌아보면 나는 여전히 옹졸한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 2020. 11. 18.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기억 코로나 사태 이후로 언택트(UNTACT)에 더하여 온택트(ONTACT) 문화가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 얼마 전 글에 썼듯이 내가 온라인 강좌를 수강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2067?category=378310 ) 앞으로도 매달 한두 가지의 강좌는 들어볼 생각이다. 9월에서 10월에 걸쳐서는 매주 1회 "NGO 해외활동"에 관한 강좌를 듣고 있다. 손자친구가 태어나 장기간의 해외 체류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지만 관심을 둔다는 의미로 수강 신청을 하였다. 최근에는 손자친구2까지 태어나 '함수'가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누가 알랴. 삶의 변화는 느닷없이 오고 앞날은 알 수 없어 신비로운 법 아니던가. "비비디 바비디 비비디바비디부!" 손자 친.. 2020.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