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찌밀꼬 XOCHIMILCO를 가는 날이다. 아스떼까 사람들이 세운 도시 떼노치띠뜰란은 앞서
말한 대로 호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호수는 육지로 변하거나 변형되었고
고대 도시는 세계 최고의 인구를 지닌 멕시코시티가 되었다.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곳이 소찌밀꼬이다.
소찌밀꼬란 아즈떼까 언어로 ‘꽃밭’이란 뜻이다.
그 옛날 중앙도시에 꽃과 야채를 보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의 모습대로 좁은 수로가 섬 사이로 지난다. 현재 남아 있는 수로의 총 길이는 무려
18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아즈떼까 사람들이 깊지 않은 호수의 바닥흙을 퍼올려
그 흙으로 밭을 만드는, 이른바 치남빠 CHINAMPAS 농법을 개발해낸 결과이다.
섬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꽃을 키운다. 멕시코시티의 오래된 건물들이 기우는 이유 중의
하나가 도시 자체가 거대한 치남빠 위에 서있어 지반이 무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멕시코시티의 남쪽 끝단에 있는 소찌밀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할 일은 한 가지. 뜨라히네라 TRAJINERA 라고 부르는, 멕시코답게 현란한 색으로
칠해진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수백 개의 배중에 하나에 올라 옛 물길을 따라가며 흔들려 보았다. 바닥이 깊지 않으므로
사공은 삿대로 호수 바닥을 밀어가며 배를 다루었다. 사실 배는 아내와 나, 두 사람이 타기에는
너무 큰 크기였다. 20명 정도는 너끈히 탈 수 있어 보였다. 아마 멕시칸들이 주로 몇 가족 단위로
몰려와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준비해온 음식을 먹거나 춤을 추며 파티를 벌이기 때문일 것이다.
호수에는 돈을 받고 노래와 음악을 연주해 주는 마리아치 MARIACHIS 나 마림바 MARIMBAS
(나무 실로폰처럼 생긴 2인조 악단) 배가 같이 떠 있었다.
그중에 우리는 마림바 악단을 불러 음악을 들었다.
신청곡을 받아주겠다고 하여 "QUIZAS, QUIZAS, QUIZAS"를 신청했다.
원래도 유명하지만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 삽입되어 더욱 널리 알려진 곡이다.
그래도 연주자는 환호를 하며 나의 선택에 엄지 손가락을 세워주는 서비스를 보였다.
"끼싸스(아마도)!" 라고 나도 화답해 주었다.
소찌밀꼬는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굉장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여행 하루 전까지도 아내와 나는 이곳을 생략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반나절쯤 시간을 내어 옛 ‘멕쉬까’인들의
번영과 지혜를 상징하는 유적도 보고, 배위에서 신명을 떨며 놀이를 즐기는 현재의 ’멕시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실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점심은 소찌밀꼬에서 따꼬로 했다. 평소 따꼬를 좋아하지 않던 아내가 고맙게도 용기를 내 준 덕분이다.
도심으로 돌아와 우리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박물관 MUSEO MURAL DIEGO RIVERA 으로 향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특별히 벽화를 모아놓은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지하철이나 도로 주변의 건물 벽 등,
여러 곳에서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사실 벽화의 본질은 그처럼 박물관이나 전시관 같은 갇힌 공간을 벗어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멕시코 혁명 직후 정치인과 미술가들은 벽화가 지닌 그런 현장성과 대중성에 주목을 했을 것이다.
명백한 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곳곳에 이른바 ‘좌빨’이 분명한 작가들의 그림에도 공간을
내어주고 간직할 줄 아는 멕시코의 포용력은 편협한 사고에 갇힌 우리 사회보다 분명 나아보였다.
*위 사진 : 시께이로스의 벽화
*위 사진 : 디에고 리베라의 타일 벽화
*위 사진 : 1968년 멕시코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위 사진 : 멕시코국립자치대학-줄여서 UNAM대학 도서관에 그려진 후안 오고르만 JUAN O'GORMAN의 벽화
디에고 리베라 박물관에는 “알라메다 공원에서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
SUEŇO DE UNA TARDE DOMINICAL EN LA ALAMEDA CENTRAL” 이라는 긴 제목에
어울리는, 높이 4,2미터, 폭 15.7미터의 큰 벽화가 있었다. 1947년에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멕시코의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한다. ‘멕시코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베니또 후아레스 같은 긍정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침략자 꼬르떼스, 막스밀리안 같은
부정적인 인물도 그려져 있다. 멕시코의 역사에 무지하다보니 무수한 인물이 등장하는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작품만큼이나 난해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궁에서부터 그런 그의 그림을 몇 번 반복해서 보다보니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역사라는 테두리 속의 집단이 만들어내는 어떤 힘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위 사진 : 그림 속 침략자 꼬르떼스. 손이 피로 물들어 있다.
*위 사진 : 그림 속 베니또 후아레스.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다.
*위 사진 : 그림 속 프리다와 디에고
그림 속에 깃털 옷을 입은 해골은 멕시코 전통의 신 께쌀꼬아뜰을 상징한다고 한다.
디에고 리베라 자신은 해골신의 손을 잡은 어린 아이로 그려져 있고 그 뒤에 그의 부인이었던
프리다 깔로 FRIDA KAHLO 의 모습이 있다.
아마 한국인으로서 박수근이나 이중섭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멕시칸으로서 디에고와 프리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렇다.
그리고 두 사람을 분리하여 말하지도 않는다. 디에고 얘기가 나오면 프리다가 이어지고,
프리다로 말이 시작되면 곧바로 디에고가 뒤따른다.
프리다 깔로는 22살의 나이에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디에고는 프리다 보다 21살이나 연상이었고 이미 2번의 결혼 경력도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 예술적 영감을 나누고 공산주의 활동도 같이 하는 동지로서 삶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둘은 모두 멕시코 미술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은 멈추질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의 고통에 시달려온 프리다 깔로에게 그것은 잔인한
고문이었다. 훗날 칼로는 리베라와의 만남을 자신이 10대에 겪은 교통사고와 같은 ‘대형사고’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반항으로 그녀 역시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그러면서도 디에고를 떠날 수
없는 그녀의 애증이 시작되었다. 고통을 못 이겨 디에고와 헤어졌다가 다시 결합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그림에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자신의 모습이 자주 드러나 있다.
그녀는 마흔 일곱의 젊은 나이에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 마지막 외출이 행복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길...”
그녀가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후 이듬해에 다시 결혼을 했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예술적 성취가 거기에 비례하는 인격적 완성을 동반해야 할 필요나 당연은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두 사람이 남긴 예술의 깊이에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삶을 보며 행복이란 의미의 한 부분은 깨닫게 된다.
적어도 그것이 고도의 예술적 성취나 그로 인해 얻은 부와 명망, 나아가 사상과 행동의 일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더 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성경에 나온 대로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것이 될 뿐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정신적’(?), ‘예술적’(?),
동지적(?) 사랑이 아니다. 그냥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노래방에 가고, 함께 여행을
가는, 그래서 서로 만지고, 비비고, 말하고, 보고, 듣는, 평범한 일상 속의 사랑이다.
*위 사진 : 프리다 깔로의 그림들.
디에고의 박물관을 나와 알라메다 ALAMEDA CENTRAL 를 걸었다. 나무가 많아서 상쾌했다.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라고 한다.
공원을 가로지른 길 끝에 흰 색의 예술 궁전 PALACIO DE BELLAS ARTES이 있었다.
공연과 전시가 끊어지지 않는 멕시코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앞서 설명한 디에고 리베라, 오로스꼬, 시께이로스 외에도 까마레나
JORGE GONZALEZ CAMARENA, 따마요 RUFINO TAMAYO 등의 대작벽화들이 있는 곳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곳을 찾은 목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대가 가득한 마음으로 예술 궁전으로 들어갔으나......
불운하게도 벽화는 모두 커튼으로 가려진 채 내부는 청소와 공사 중이었다.
2014년 6월이 되어야 커튼을 거둘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부터 이걸 보러 왔는데
잠깐이라도 커튼을 내려야 한다고 과장된 억양과 몸짓으로 억지를 부려 보았다.
궁전의 안내원은 미안하다고 그때 다시 오라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쉬움의 여지를 남기는 여행이 좋다고 남에게 쉽게 건네는 충고가 위선임을 이럴 때 깨닫게 된다.
속이 쓰렸지만 얇은 팜플렛에 인쇄된 그림을 훓어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