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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멕시코 및 중남미

바하마의 '날씨! 날씨! 날씨!'

by 장돌뱅이. 2014. 7. 11.


*위 사진 : 내가 꿈꾸던 바하마(출처 : SANDALS RESORT 홈페이지)

다시 또 토막 시간이 주어졌다. 미국 주재 말년에 생겨난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기간이 길다면 평소 가기 힘든 먼 곳 - 일테면 남미 정도를 꿈꿔보겠는데,
4박5일로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엔 여행지로 보스톤을 생각했다. 겨울이라 춥기는 하겠지만 미국 생활 하면서
동부의 매서운 겨울 날씨를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라는, 그렇지만 하바드와 M.I.T, 레드삭스와 셀틱스,
그리고 미술관(MFA)과 보스톤 심포니로 귀에 익은 도시를 걸어보고 또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백년 이래 최강의 추위와 눈보라가 미국의 북동부를 휩쓸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마저 얼어붙는 극한의 추위였다. 항공기의 결항은 수백 건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매일 반복되었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둘러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아내가 ‘그렇다면 이번엔 돌아다니는 여행 말고 한 곳에서 푹 쉬는 일정을 잡아보자’ 고 했다.
해변이거나 섬이겠다. 하와이와 캐리비안의 섬들을 저울질 하다가 바하마로 결정을 했다.
항공노선이 다른 곳에 비해 간단하여 짧은 일정에 가장 적합했다.

2013년에 다녀온 남미의 마추삐추와 중미의 멕시코시티에 이은, 2014년의 캐리비안이라는
지역적 안배가(?) 여행의 구색을 갖추는 것 같기도 했다.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면서
푸른 하늘과 작렬하는 태양, 하얀 해변과 옥색 바다를 떠올렸다.
일부러 해변에 접한 숙소를 골랐다. 한번 숙소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공항에서 숙소까지의 교통편과 숙소 이외의 다른 정보는 알아보지 않았다.
 

 

7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바하마의 공식 이름은 THE COMMONWEALTH OF THE BAHAMAS 이다.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수도는 뉴프로빈스 NEW PROVINCE 섬의
낫소 NASSAU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목적지는 낫소가 아니라 그 앞바다에 떠있는(다리로 연결된)
파라다이스 섬이었다. 바하마는 ‘영원한 유월의 섬 ISLES OF PERPETUAL JUNE’이라고 부른다.
일 년 내내 기온이 온화하고 320일 이상의 맑은 날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샌디에고를 출발하여 미동부의 뉴어크 NEWARK를 경유한 비행기가 바하마의 낫소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절차를 기다리는 홀에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삼인조 밴드가 흥겹게 연주를 해주고 있었다.
근엄한 분위기에 약간은 긴장되기 마련인 입국심사대의 분위기가 음악으로 인해 한결 부드러웠다.
열정적인 춤과 음악의 캐리비안다운 발상이었다. 

숙소의 방 배정을 받고 휴식을 취하다가 해변을 걸었다.
온전한 3일이 있기 때문에 첫날부터 서둘러 수영복을 적실 필요는 없었다.
바다는 캐리비언 바다 하면 떠오르는 그 물빛이었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모래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해가 기울고 별이 돋아났다.
물로 씻어낸 듯 맑은 빛의 별들이었다. 두툼한 지갑처럼 남은 일정에 첫날 저녁은 마냥 행복했
다.
 

 

비극은 밤 사이에 일어났다. 이튿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하늘을 기대하며 커튼을 걷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회색의 하늘 아래 야자나무의 잎에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수영장엔 내리꽂히는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무질서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으아! 이건 또 무슨 조화야???”

나는 밖으로 나가 빗속에 서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은 두터운 매지구름으로 가득했다.
바닷가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있었다. 수영을 하지 말란 뜻이겠다.
바다는 어제완 달리 탁한 빛을 띄고 있었다. 비와 바람 속에 바다는 높은 파도로 뒤척였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숙소의 직원에게 마치 궂은 날씨가 숙소의 잘못인 것처럼
볼 멘 소리를 해보았다.

“아니 도대체 날씨가 왜 이러냐?”
직원은 "미국의 강추위 때문에 이곳 날씨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 했다.

“어떤 영향을 받았건 언제 비가 그칠 것 같냐?”
“일기예보에 3일 동안 온다고 했다.”
“안돼! 나는 3일 뒤엔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떼를 쓰는 개구쟁이처럼 말을 했다.
지난 마추삐추에 이은 또 한번의 날씨 불운이었다.
이번의 경우가 더 나빴다. 게다가 3일 연속이라니!
여름철도 아니라 오기 전 바하마에 비가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매번 해보던 여행지의 날씨 체크를 안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방에 돌아와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날씨방송을 찾았다.
비가 오더라도 동남아처럼 잠시 내리다 그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시간대별 일기예보는
한밤중까지 온통 우산과 빗줄기로 가득 했다.

가볍게 생각했던 3일의 시간이 별안간 무거운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뭘 해야지?
궁리를 해봐도 비가 오고 바람 부는 해변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집어온 섬 지도를 그제야 꺼내 보았다. 지도와 광고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비가 올 때 할 일을 찾아보았다. 근처에 있는 리조트 ATLANTIS 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책을 읽다가 비가 설핏해지면 구경을 가보기로 했다.

아틀란티스는 호수와 풀장, 수족관과 카지노, 상점가와 여러 개의 식당이 있는 거대한 규모의
리조트였다. 궂은 날씨 때문에 해변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리조트의 실내에 가득 했다.
식사를 하고 커피점에서 책을 읽었다. 카지노에서 재물운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재물운도 날씨운과 같았다.
 

 

 

 

 

 

 

이튿날도 날씨는 여전했다. 사람들마다 이건 바하마의 일월 날씨가 아니라고 했다.
아침을 먹고 책을 읽다가 잠시 비가 주춤하는 사이에 다시 길을 나섰다,
부두로 가서 수상 택시를 타고 낫소 시내로 가보았다. 번화가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도로는 좁았고 차들은 많았다. 오래된 건물들은 한결같이 파스텔톤의 옅은 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곳 특산물이라는 소라(CONCH) 튀김을 점심으로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길을 걷는데 다시 비가 쏟아졌다.
가까운 호텔에 들어가 로비에 앉아 책을 읽으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저녁 나절 숙소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빗소리를 들었다.
비가 귀한 샌디에고 같으면 낭만적이라고 좋아했을 분위기였다. 젊은 여성 손님 몇 명과 바의 직원이
의자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비 때문에 우중충한 기분이 잠시 맑아지기도 했다.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하마 사람들 - 슈퍼의 계산대 직원도, 기념품점의 아가씨도, 호텔 로비의 직원도
음악만 나오면 어깨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일을 했다.

이제 하루가 남았다. 바하마의 기억이 비로 채워진다는 것은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지만 그것이 바하마 여행에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이 밝았다. 커튼 사이가 유난히 밝아 혹시나 하고 제쳐보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텔레비전의 날씨예보는 여전히 ‘비비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해변으로 가보았다. 물빛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수평선은 선명했다.
나는 신이 나서 아침 식사를 하고 해변으로 나갔다. 파도는 여전히 높고 거셌다.
사람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파도타기를 즐겼다. 나도 덩달아 파도를 탔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 휩쓸리기도 했다. 짠물을 들이켜 코가 얼큰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날씨가 맑았다. 앞으로는 계속 맑을 것이라는 예보도 있었다.
원했던 바다를 하루라도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아쉬움은 남았다.
운동선수들은 흔히 심판의 실수나 자신의 불운도 경기의 일부라고 말하곤 한다.
그것을 원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여행도 그럴 것이다. 예상하지 않고 원하지 않았던 실수나 불운. 그것도 분명 여행의 일부이다.
다만 그 놈의 이론적 당위를 가슴으로까지 인정하기가 운동선수와 여행자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일 뿐이다.
 

 

 

특이하게도 미국 입국심사대는 바하마 공항에 있었다. 바하마가 미국령이었던가? 그렇게 들었던 것도 같다.
비행기가 솟아오르자 바다 물빛이 유난히도 더 파랗게 보였다.
 

 

샌디에고로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에서 LPGA 중계를 보았다. 바하마에서 열리는 경기였다.
한국의 최나연선수가 막판까지 선전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카메라가 바하마의 푸른 하늘과 바다를 비출 때,
아나운서가 “날씨가 경기에 매우 협조적”이라고 멘트를 날렸다.
그러자 해설자가 옆에서 거들었다.
“예, 이즈음 바하마의 날씨는 거의 항상 이렇죠. 아름답습니다.”
나는 아쉬운 기억이 되살아나 공연히 트집을 잡아보았다.
“저런 순 엉터리 해설자!. 바하마 날씨가 뭐가 항상 저렇단 말이야! 불과 며칠 전 일도 모르는 게...... ”
 



*여행시기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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