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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멕시코 및 중남미

멕시코시티 3

by 장돌뱅이. 2014. 5. 6.

숙소 식당에서 메뉴를 보는데 수프의 메뉴 중에 메뚜기와 함께 나오는 수프가 있었다.
종업원에게 ‘메뚜기가 같이 나온다’는 말이 정확하게 어떻게 나온다는 뜻이냐고 했더니
수프에 기름에 튀긴 메뚜기를 뿌려서 나온다고 했다.
‘메뚜기 토핑 수프?’
어렸을 적 메뚜기튀김을 먹어보긴 했지만 수프와의 조합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지라
조금은 엽기적이라 느껴졌다. 별로 내키지 않아 다른 것을 고르려고 했는데, 종업원이
메뚜기를 수프에 넣지 않고 별도의 그릇에 담아오겠다고 한번 시도해보라고 했다.
호기심에 시켜보았다. 수프의 맛은 평범했다. 메뚜기튀김도 어릴 적 먹던 그 맛이었다.
수프에 넣어 먹어보았는데 별로 어울리는 맛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이런 음식을 만드느냐는 질문에 종업원은 원래 옛날 멕시코인들이 메뚜기를
즐겨 먹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맛 좀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메뚜기는 정력제야.”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가 한심하다는 투의 표정을 응답으로 받기도 했다.

말이 너무 곁가지로 흘렀다.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큰 숲지대인 차뿔떼뻭 공원 BOSQUE DE CHAPULTEPEC 은
아스떼까 말로 “메뚜기 언덕”이라고 한다. 아마 그 옛날에는 메뚜기가 많았었나 보다.
흔한 먹을 거리가 식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식당 종업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차뿔떼뻭 공원은 공원 면적이 4평방킬로미터에 달하며 박물관과 동물원, 호수 등이
있는 문화적 놀이공간이다. 멕시코가 자랑하는 국립인류학박물관 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 가 그곳에 있다.

박물관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마야의 사원에서 영감을 얻어 설게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멕시코의 역사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방대한 크기의 전시실 속에
멕시코의 모든 시대의 유적들을 모아 놓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ㅁ’자형으로 둘러선 건물 한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기둥을 만나게 된다.
우산처럼 네모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원래는 분수대라고 들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 기둥은 ‘생명의 나무’로 불리며 지하, 지상, 그리고 하늘의  연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박물관내 카페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전시실을 돌았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3곳의 - 이번
여행의 관심지인 떼오띠우아깐와 아스떼까, 그리고 몇 해 전 깐꾼을 여행하며 잠시 맛볼 기회가
있었던 마야문명 - 전시실만 돌아보는 것으로 한정을 지었다.

떼오띠우아깐은 AC 300-600년 사이,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즈음에 멕시코와
그 일대의 이른바 메소아메리카에서 번성한 문명을 말한다. 전시실에는 이틀 뒤에 보러갈
껫살꼬아뜰 신전이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붉은 채색까지 된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위 사진 : 때오띠우아깐 전시실

멕시코 고대 마지막 왕국이었던 아즈떼까는 현대 멕시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아스떼까 전시실은 당연 박물관의 중심이었다. 위치도 정 중앙에 있으며 크기도 가장 크고
전시품들도 가장 많았다. 개개의 전시물들에 대한 쉬운 해설이 덧붙여졌다면 더 풍부한
관람이 되었겠지만 그냥 옛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담겼을 유물들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전시실의 중앙에 ‘아스떼까 캘린더’ 혹은 ‘태양의 돌 PIEDRA DEL SOL’이라 부르는 석재 원판이 있다.
이 원판은 아스떼까 사회의 우주관을 표현한 돌로 농사와 의식의 시기를 결정하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아스떼까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다섯 번째 태양’의 시기로 이전까지 4개의 태양은
존재했다가 소멸되었다고 한다. 각 태양의 소멸과 함께 그 시기에 살던 인간들도 모두 망했다는 것이다.
신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다시 다섯 번째 태양이 운행되기 시작했으므로 태양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야 하며 그것이 대규모의 인신공희를 통하여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을 바치는 제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신공희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인육을 먹기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자들의 통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등등 다양한 설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고대의식은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대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있었던
의식이었다. 우리나라의 구전문학 심청전에도 뱃길의 무사함을 빌기 위해 심청이를 제물로 던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 마야나 아즈떼까에서의 특징은 그것이 권력과 제도에 의해 대규모로 행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위 사진 : ‘태양의 돌 PIEDRA DEL SOL’

아래 사진은 아즈떼까의 뜰라뗄롤꼬 TLATELOLCO 시장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침략자 꼬르떼스에 따르면 매일 30,000명 이상이 모여 상품을 교환했던 시장이었다.
아즈떼까의 번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하겠다.

차끄물 CHAC-MOOL이란 ‘캐릭터’에 대해 잠시 말을 하고 가야겠다. 차끄물은 고대 멕시코 문화에서
나타나는 신과 인간의 중간 형태를 의미하는 석상이다. 보통 무릎을 세우고 상반신을 반쯤 일으키고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를 취한다.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손을 배위에 놓고 그곳에 공양물을 담은 용기를
올려놓고 있다. 기본적인 사양은 같지만 시기아 장소에 따라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위 사진 : 뗌플로 마요르에서


*위 사진 : 박물관 떼오띠우아깐문명실에서
 


*위 사진 : 박물관 아즈떼까문명실에서 


*위 사진 : 박물관 마야문명실에서. 상태가 온전해서인지 이것이 가장 세련된 모습이었다.

세 곳의 전시실을 돌고 나니 다리가 뻑적지근해왔다. 우리는 박물관 벤치에 앉아 느긋한 휴식을 취했다.
박물관 정원 여기 저기 아예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바로 그 옆에서는 ‘19금’ 수준의 키스씬을 라이브로 보여주는 커플도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차뿔떼백 성 CASTILLO DE CHAPULTEPEC으로 향했다.
성까지는 공원의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야 했다. 길가에는 장난감과 솜사탕, 기념품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원래도 많았겠지만 북미FTA를 체결하고 난 뒤 일자리
에서 밀려난 사무직들이 생계를 위해 대거 노점상으로 나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FTA의 부문별 혹은 종합적 손익을 따지는 것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 보다 앞서 FTA를 체결한 나라들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멕시코는 더 이상 FTA를 체결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바 있다.

길을 걸어가는데 한 멕시칸이 다가와 불쑥 카메라를 내민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줄 알았더니
자신들과 함께 사진을 찍자는 수줍은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아내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서 주었다. ‘멕시코는 외롭지 않다’라는 말이 있던가.
붙임성 있고 놀기를 좋아하는 멕시칸들의 여유로운 심성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차뿔떼백 성은 작은 언덕 위에 국립 역사박물관과 함께 있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와 전쟁시 나폴레옹3세의 후원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
막시밀리아노 MAXIMILIANO 의(나중에 멕시코 집권 세력에 의해 총살됨) 거주지였다가
이후 멕시코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됐던 곳이라고 한다.

차뿔떼빽 성과 나란히 있는 역사박물관 입구의 천정과 벽에 멕시코 3대 벽화가 중의 한 사람인
씨께이로스 DAVID ALFARO SIQUEIROS 의 벽화가 있었다. 공산당 지도자이자,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던
씨께이로스는 벽화운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론가였다.
그는 동료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조차도
‘민중주의 정치가들과 백만장자들에게 종속된 지적 속물’로 취급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1932년에 멕시코 벽화운동이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멕시코 르네상스는 현대를 추구했지만 의고적이었다. 기념비를 추구했지만 현란함에 그쳤다.
프롤레타리아적이길 원했지만 민중적인 것의 모사에 불과했다. 전복적이길 원했지만 신비주의에 그쳤다.
국제주의적이길 원했지만 민속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것은 혁명을 향한 도정에 올랐지만 미학적, 정치적,
그리고 심각하게도 반혁명적 기회주의에 머물고 말았다”
(이성형의 책, 『라틴아메리카 문화 기행』참고 및 재인용)

그러나 모든 운동에서 완벽한 성공이 없듯 완벽한 실패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것도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어떤 한계가 있었을 뿐이리라.
더 나은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우리나라 80년대의 ‘불’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단순히 실패라고
단정하기엔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웠었지 않았던가.
역사는 늘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숙제가 남는 법이다.

씨께이로스의 벽화는 디에고 리베라의 현란한 색채감이나 오로스꼬의 냉소적인 처절함과는 다른
힘과 박진감이 이 넘쳐났다. 뒷날 방문 예정인 “예술의 궁전”에도 그의 그림이 있다고 하여 기대감을
가졌으나 아쉽게도 수리 중이어서 이곳의 벽화가 유일한 감상의 기회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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