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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멕시코 및 중남미

멕시코시티 2

by 장돌뱅이. 2014. 5. 6.

 

멕시코 국기에는 독수리와 뱀, 그리고 선인장의 문양이 들어있다.
독수리가 뱀을 물고 선인장 위에 앉아있는 곳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아스떼까 LOS AZTECA 사람들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계시에 따라 아즈떼까 사람들은 지금의 멕시코시티의 중심인 소깔로 광장에
떼노치띠뜰란 TENOCHITITLAN 이란 도시를 세웠다. 지금은 육지이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호수 속의 섬이었다고 한다. 떼노치띠뜰란은 번성을 구가하여 인구가 8만에 달했다고 한다
(15만 이상이었다고 주장하는 글도 보았다.)> 당시 스페인 최대도시의 인구가 4만5천명 정도였다고
하니 떼노치띠뜰란의 규모가 굉장했던 것 같다.

1519년 스페인의 꼬르떼스 HERNAN CORTEZ 라는 인물이 병사들을 이끌고 침략을 했을 때
원주민들은 전설 속의 자신들의 왕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을 했다. 태평성대로 세상을 이끌던
전설 속의 왕, 껫살꼬아뜰은 별안간 바닷속으로 떠나며 언젠가 자신의 생일날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던 것이다.

바다로부터 나타났고 하얀 피부에 수염이 있고(멕시코 원주민들에겐 없다고 함),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동물인 커다란 말에(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었다.) 올라탄 침략자들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왕으로 보고 환영을 했다.
(이 ‘희극적’ 비극의 이야기가 역사적 정설일까?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야담일지라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로는 생각된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기대했던 왕이 아니고
한낱 황금과 보물의 노리는 약탈자며 학살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항전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혈전 끝에 패배하게 된다.

대륙을 정복한 침략자들은 아스떼까 왕궁과 수많은 기록들을 불태우고 철저히 파괴했다.
모든 황금은 스페인으로 운반하기에 편리하도록 녹여서 막대기 형태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아스떼까는 앞선 마야 문명과 함께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 인류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위 사진 : 멕시코시티의 옛 모습. 아즈떼까 사람들이 만든 도시 떼노치띠뜰란(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촬영)

아침부터 인파들로 붐비는 소깔로 광장으로 탐방을 나섰다. 숙소가 소깔로 광장에 접해 있어 편리했다.
국립궁전부터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며 관람을 했다. 그러나 글의 전개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뒷부분 성당부터 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번 여행의 중요한 두 가지 목적 중의
하나인 벽화(MURAL)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멕시코의 피라미드인 떼오띠우아깐이다.
 

 

 


*위 사진 : 대성당의 안팎

대성당 CATEDRAL METROPOLITANA은 아스떼까인들의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들어선
정복자의 ‘기념관’이다. 240여 년의 시간에 걸쳐 여러 번의 증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남미의 16세기 역사는 지역에 상관없이 너무 비슷하다. 나는 마치 지금 지난번에 썼던
페루 꾸스꼬의 여행기를 다시 쓰고 있는 것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꾸스꼬에서는 그래도
잉까의 흔적이 기단의 석재로라도 남아있었다면 멕시코시티의 소깔로에서는 아스떼까의 자취가
아예 땅속에 
묻혀버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당의 앞마당에는 투명유리를 통하여
땅속에 남아 있는 옛 신전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 사진 :뗌쁠로 마요르

대성당의 왼편쪽으로는 뗌플로 마요르 TEMPLO MAYOR라는 유적이 있다.
아즈떼까인들의 도시 떼노치띠뜰란의 중심이 되는 신전의 흔적이다. 이곳은 최근에 발견되었다.
1979년 수로공사 주에 땅속에서 석판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어 1984년에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78개나 되는 피라미드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템플로 마요르는 파괴되어
땅속에 묻혀있었던 만큼 시각적으로 크게 볼 것은 없다. 유적의 사잇길을 걸으며 수백년 전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그저 상상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위 사진 : 대통령궁과 회랑에 그려진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대통령궁 PALACIO NACIONAL은 대통령 집무실과 몇몇 행정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원래 아스떼까 왕국의 궁전이 있던 자리였으나 스페인 침략자 꼬르떼스가 이를 부수고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곳은 회랑을 따라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DIEGO RIVERA가 그린 거대한 벽화
MURALS 로 가득하다. 아내와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바로 그 벽화를 보기 위해서다.
이곳 리베라의 벽화는 스페인의 침략에서 독립에 이르는 400년간의 역사를 그린 것이라 한다.

작년 여름 LA 카운티 미술관을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에 나는 디에고 리베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은 적이있다.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는 멕시코의 유명 화가이다. 그림을 좋아하건 안하건 회사 내
멕시칸 직원들을 포함하여 내가 아는 대부분의 멕시칸들이 그의 이름과 역시 화가였던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를 알고 있었다. 멕시코시티를 여행하기 위해 공부를 할 때 가장 많이 나온 단어도
디에고 리베라였고 벽화였다. 그는 멕시코의 국민화가이자 현대 미술의 상징인 것 같다.

20세기 초 멕시코는 10년여에 걸친 혁명(혹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여러 세력들이 합종연횡을 이루며 격렬하게 싸운 끝에 독재를 무너뜨리고 입헌공화정을 세웠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혁명의 과정에서 숨졌다고 한다. 
 

혁명 세력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과 혁명의 의미를 두루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인구의 80퍼센트가 문맹인 나라에서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림이 한 대안이 되었다. 이에 유럽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급변기의 조국에 돌아와
미술계의 변화를 주도하던 디에고 리베라가 적임자로 떠올랐다.  

그는 멕시코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침략 외세와 민족의 저항으로
단순화 하고 저항세력과 인디오 문명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벽화를 제작하였다.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의 대형 벽화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힌다.  

출발의 의미와 진행의 과정이 같지는 않지만 그의 벽화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거대 담론’의 시기였던 우리나라 80년 대 판화 제작의 열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그림의 형태와 색채는 멕시코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원래 그림이나 색채, 더군다나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알지 못하는
내게 리베라의 그림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좀 쌩뚱맞지만 우리나라의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잡으시고 / ...... / 고구려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장군 이사부 /...... ” 를
곡조도 모르는 채 처음으로 따라 부르는데 단군이나 온조왕, 광개토대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기분과 같았다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다만 침략 이전 원주민의 세상은 아름다운 낙원처럼 묘사되었고, 이를 파괴하는 침략자들의
만행은 악마적 모습으로 강조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위 사진 : 싼 일데폰소 박물관

벽화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디에고 리베라에게서가 아니라 또 다른 대가인 호세 끌레멘떼
오로스꼬 JOSE CLEMENTE OROSCO에게서 받았다. 대통령궁 근처에 있는 싼 일데폰소 박물관
MUSEO DE SAN ILDEFONSO에는 오로스꼬의 벽화가 층마다 가득했다.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 한가롭게 회랑을 거닐거나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위 사진 :부자들의 연회 EL BANQUETE DE LOS RICOS

혁명에 대한 찬가로 일관했던 디에고 리베라와는 달리 그의 그림에선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혁명이나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엿보였다.
사실 멕시코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거나 좋게 말해서 미완의 혁명이었다.
장기 독재를 무너뜨리고 부분적 개혁에는 성공했지만 지도자들 사이의 내분과 갈등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토지 개혁 등의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얻은 성과로서는
허망한 것이기도 했다. 오로스꼬는 바로 그런 것을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벽화가 커서 전체를 사진기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서툰 솜씨로 찍어 볼 품 없는 사진이지만
그가 견지했던 정직한 시선의 일부분이나마 옮겨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위 그림 : 참호 LA TRINCBERA 


*위 그림 : 귀족들 LOS ARISTOCARATAS 


*위 그림 :「법과 정의 LA LEY Y JUSTICIA」 


 *위 그림 :「혁명가들 REVOLUCIONARIOS」


*위 그림 : 「가족 LA FAMILIA」 


*위 그림 : 「이별 LA DESPEDIDA」 


*위 그림 : 「무덤 파는 인부 SEPULTURERO」 


*위 그림 : 「꼬르떼스와 라 말린체 CORTEZ Y LA MALINCHE

꼬르떼스는 침략자의 이름이고 밀란체는 실제로 그의 통역이자 원주민 아내였다.
그러나
꼬르떼스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그녀를 아이와 함께 버렸다. 심지어 꼬르떼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그녀를 자신의 부하에게 넘겨주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동족에게 돌팔매를 맞는 수모도 당한다. 그림 속에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이 결합이
태어난 최초의 혼혈 메스띠조인 마르띤 꼬르떼스가 버려져 있다. 비운의 메스띠조.
그러나 메스띠조는 이제 멕시코민족 구성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며
멕시코 민족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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