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1999 방콕&푸켓1

by 장돌뱅이. 2017. 8. 20.

*여행시기 : 1999년 1월
               

원래 1999년에 여행 사이트(AQUA)에 올렸던 글인데 사이트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옮겨 놓는다.
오래된 글이라 정보 가치는 없지만 우리 가족의 추억이고 기록인지라.....
게다가 나로서는 인터넷에 처음으로 올린 글이기도 하다.

필름 카메라로 찍어 스캔한 사진은 여행 시기와 일치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여행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몰라 그냥 첨부시킨다.

=====================================================================


1. 출발
여행 떠날 준비를 하다보면 가끔씩 아내와 부딪히게 된다. 짐 꾸리는 일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가능한 가볍게, 가능한 조금만 가지고 가자는 주의이고 아내는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가자는 주의이다. 옷을 예로 들자면 나는 여행일자에 관계없이 입고 신은 것 외에는 티셔츠와
속옷 한 두벌, 양말 한두켤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아내는 여행일자에 맞추어 갈아입을 옷과
양말의 숫자를 일치시키고 심지어는 일자별로 종류별로 입을 옷을 따로따로 별도로 포장을 하기도 한다.
"여행 물품을 챙기랬더니 피난 보따리를 꾸려 놓으면 어떻하냐?"고 빈정거리기도 해보고
"HOTEL LAUNDRY에 맡기면 되니까 조금만 가지고 가자"고 해보아도 변함이 없다.
"까짓 빨래에까지 외화 낭비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애국적(?) 경제 논리까지 펴 가면서
억척스런 아줌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옷뿐만이 아니다. 비상약도 그렇다. 나는 평소 혼자 여행을 할 때에는 약 따위는 가지고 다녀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그리 좋은 버릇은 아니다. 하지만 식구들과의 여행에는 최소한의 비상약은 가지고 가야한다고
생각하여 준비하는 편인데 아내의 생각에는 늘 미흡해 보이는 듯 하다. 아내는 설사약, 소화제, 감기약, 모기약에
몸에 붙이는 파스와 밴드류에 어떨 땐 박카스나 우황청심환도 넣는다. 종류도 종류지만 양을 놓고 항상 의견이
엇갈린다. 언젠가는 손바닥만한 거실 바닥에 준비물을 일렬로 가득 늘어놓고 "이게 내가 가지고 갈 물건들이니까
당신이 한 번 점검해봐" 하며 자못 협박조로 말을 한 적도 있다. 해서 이번에는 아뭇소리 없이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짐 꾸리는 일 자체만 거들기로 했더니 보조 가방 말고 여행용 가방만 3개가 되었다.
작년에 갈 때는 딸아이 것 하나 우리 부부 합쳐서 하나 이렇게 2개 였었는데......

딸아이는 제 몫으로 주어진 가방에 이제는 제법 익숙한 솜씨로 자기 짐을 챙긴다.
딸아이는 중학교 2학년으로 그룹H.O.T의 열렬한 팬이다. 때문에 H.O.T의 노래를 제일 즐겨 듣지만
그 외에도 유승준, S.E.S, 신화 등등 이른바 신세대 노래를 다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장르의
노래에는 매우 인색하여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는다. 먼 길을 운전할 때나 우중충한 날씨에 비라도 흩뿌려
감상적인 분위기라도 되면 아내와 난 조용한 옛노래가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내와 난 조동진이나 어니언스등의
통키타 가수를 좋아하는 동갑내기 '쉰세대'이다. 그러나 2대1인들 딸아이와 벌이는 음악 청취권에 대한 논쟁에서
승률은 높지 않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은 정확한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느 날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탄식하듯 말씀하셨다.
"어째 요즘 노래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들이냐? 노래가 아니라 악을 쓰는 거지 원......"
선생님의 '요즘 노래'는 이장희의 '그건너', '한 잔의 추억'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노래를 좋아하시는데요?"
"무슨 노래? 적어도 노래라면 박재란의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하는 정도는 되어야지 말이야.
아 가사 내용도 얼마나 아름다워. 요즘 노래는 뭔 소린지 따라 부를 수도 없으니...... 쯔쯔쯔"

그 때 우리는 낄낄 거리고 웃었다. 웃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언제건 변해가는 세상의 속도에 쉽게 적응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몇 번인가 나는 딸아이에게 '요즈음 노래들은 말이야......'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때 그 선생님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아 정말 이런 식의 '노털'은 되기 싫었는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짐을 꾸리던 아이가
"아빠엄마 CD도 몇 개 고르세요"하며 인심을 쓴다.

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생기는 이런 작은 부딪힘을 좋아한다.
그런 아웅다웅에는 흥미진진한 본편을 예감케하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2. 방콕 입국
심사대 앞에서
태국 도착시간 22시40분, 한국시간으론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다. 한국은 떠나왔고 태국은
입국하기 전이니 지금은 '오늘과 내일'의 사이 어디 쯤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태국. 내 기억 속의 최초의 태국은 밧데리를 고무줄로 묶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킹스컵 축구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 속에 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상하常夏의 나라, 태국의 수도 방콕입니다. ......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도 선명한 우리 선수들.....대한의 건아......청룡팀......"
TV가 흔치 않던 시절이고 위성 중계 방송이라고는 아폴로 11호 달 착륙 중계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라디오로 중계되던 축구중계는 얼마나 가슴 조이는 일이었던지.

사실 요즈음 들어보면 라디오로 하는 축구 중계는 아무리 아나운서가 잘 한다하더라도
도대체 공이 어디쯤에서 놀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저 승패나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열한명 대 열한명이 겨루는 축구경기 이상의 의미였다.
멀고 먼 나라, 우리 편이라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아닌 수천 수만명의 적군과 불굴의 정신력으로
고군분투하며 싸우는, 위대한 전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더구나 중계방송에 따르면
상대방은 반칙만 일삼고 심판과 관중까지 합세해 정정당당하기만 한 '우리의 대한 건아'들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었기에 아나운서의 말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또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슈우우웃"하며 가파르게 솟구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정점에서 잠시 뜸을 들이는 그 짧은 순간에
나 역시 조바심치며 숨이 턱에 닿았다가 "꼬오오ㄹ인"하는 소리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이불을 박차고
함성을 지르다 "이제 그만 자라"하는 어른들의 꾸중을 듣기도 했다. 모든 상황을 청각을 통해서만 전달해야
했으니 아나운서는 무엇인가 끝없이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 때 과장된 중계방송으로 인기를 끌었던
아나운서 이모씨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씨는 상대방이 슛한 것은 아무리 잘했어도 '어림없는 뽈'이고
우리 편 슛은 무조건 '앗깝습니다'였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엔 국내에서 전국체전중계를 할 때에도 버릇이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는 멘트로 방송을 시작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운 기억은 돌이킬 때마다 우릴 훈훈하게 한다.
길을 가다 우는 아이가 있는데 달래
주고 가지 않으면 내 기억 속의 그 때 그 아이는
언제나 울고 있는 아이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마 생떽쥐베리일 것이다.
앞으로 며칠동안의 이 곳에서의 시간이 먼 훗날에도 우리 가족에게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행운 있으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