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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0발리2

by 장돌뱅이. 2017. 8. 3.

14.볼 것은 남루함만이 아니다 
숲이 어둠 속으로 풀어져 검은 빛이 되었을 때 나는 호텔을 나섰다.
TJAMPUHAN호텔에서는 투숙객이 원하면 우붓 시내의 원하는 장소까지 차로 태워주었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사실
우붓에서 큰길을 따라 걷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못된다.
차량과 오토바이가 쉴 새없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붓에서는 가능한 걷기로 했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거리의 상점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또 다른 재미이므로.



호텔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고 지난 여름 식구들과 점심을 먹었던 카페를 지나고 조각품과
그림과 기념품을 파는
여러 가게를 힐끔거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카페 로터스에 도착했다.
로터스는 힌두사원과 맞붙어있다. 연꽃이 있는 연못 사이로 사원으로 가는 돌로 된 길이 있는데
길 양쪽과 사원의 문에 등잔불을 늘어놓아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로터스는 사원을 바라보며
툭 터져있다.
지난 여름 식구들과 이 곳에서의 종교행사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은 곳이다.

식사와 맥주 한병을 시켜 등잔불의 일렁이는 불꽃을 보며 맛있게 먹었다.
우붓에서는 매일 저녁 발리 전통춤의 공연이 있다.

자세한 일정은 우붓 중심에 있는 여행안내소에서 유인물로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준다.

식사를 마치고 그림자극(WAYANG KULIT)을 보러갔다. 인도네시아의 그림자극은 흰색천
뒤쪽에 횃불을 세우고
소품을 이용해 그림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것이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이 모든 등장 인물의 움직임과
대사를 맡는 일종의 원맨쇼인데
마치 우리나라의 시조창을 하는 듯한 곡조를 지녔다.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사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공연장 입구에서 나누어준
팜플렛상에서 읽은 대강의 줄거리와
나쁜 캐릭터와 좋은 캐릭터의 구분만으로도
그림자극을 즐기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또 진행자가 가끔씩 영어와 인니어로

적절한 즉흥대사를 사용하여 자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그림자극은 여섯시간 이상이 걸리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 우리가 본 것은 1시간 반정도 걸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발리의 예술이 그렇듯이 관광객용으로 변모된 것인지
모르겠다.
극이 끝나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았다. 소품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가운데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거무튀튀한 손으로 무덤덤히 공연 뒷정리를
하는 모습에서 장인의 기운이 풍겨나왔다.


발리에는 우리나라와 문화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그림자극의 대사 음조가 그렇고,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비슷한 돌장승이 그렇다.
발리의 카페에서만 눈에 띄는,
지붕이 초가집처럼 생긴 정자 속에 평상을 놓아
양반다리의 자세로 음식을 먹는 장소도 우리 것과 유사해 보였다.

특히 돌하루방은 발리에서 대만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닿는 해류를 타고 전해진
남방문화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모양이다.

공연을 보고 다시 거리로 나오자 시간이 아홉시에 가까웠다. 차량 호객꾼들이 말을 걸어왔다.
숙소까지 다시 또 그냥 걸었다.
문득 거리가 어둡다는 것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불이 켜있는 몇 곳은 카페인 듯 싶었다.
밤이 깊을수록 화려해지는 서울의 밤거리와는 대조적이었다.

발리인들의 여유일까?.
진실로 잘 산다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 
행복은 국민소득 순으로 정해지는 것일까?

몇해 전 인도네시아에 살 때 인니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끔 자문해 보곤 했다.
당시에 나는 새로 건설한 공장의 시험 가동을 위하여 일요일에도 작업자를 출근시켜야 했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은 작업자들이 한 푼이 아쉬운 처지이면서도 일요일은 쉬고 싶어했다.
어르고 달래고 은근한 협박과 특별 격려금까지
걸면서 힘들게 계획을 짜놓아도 막상 일요일 당일엔
반정도만 출근을 하여 사람을 당황하게 하였다.

'게을러터진 놈들 같으니라구.'
그럴 때마다 다른 동료들처럼 나 역시 그들에게 불평을 해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왜 이렇게 바빠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리는 왜 이렇게 악착같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게으름'이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최소한도 그들의 빈곤을 '게으름' 탓이라고만 보고 싶지 않았다.
서정주의 말처럼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파괴하는 죄악이지만 그들이 가난한 삶 속에서도 보여주는 느긋함은
우리 사회가 예전에 잃어버린
어떤 소중함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일찍 가게문을 닫은 우붓의 거리를 아늑한 기분에 젖어 걸었다.


우리가 많은 것을 희생시켜 가며 그토록 악착같이 영악스럽게 이루었던
단 하나의 신화인 경제성장은 이미 몇해 전
IMF로 허무하게 끝을 보았다.
우리는 정말 궁핍해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가치를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다시 일어서야 하겠지만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정말로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15.너무 작은 나에 대한 기억
아침에 눈을 뜨니 베란다 쪽 창문의 커튼에 달걀 노른자처럼 뽀얀 햇살이 걸쳐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자 숲에 햇살이 가득하다. 햇살은 짙은 숲의 음영을 가르며 선명한 직선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여기저기 나뭇잎 끝에서 사금파리처럼 흰빛으로 잘게 부서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청솔모처럼 생긴 놈이 나타나 나뭇가지를 잡고 이나무 저나무를 날렵하게 뛰어다닌다.
녀석의 뒤를 따라 햇살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계곡물 소리와 새소리가 숲에 가득한데도 나는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베란다 의자에 길게 드러누웠다.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세상을 여행하며 나누는 이야기와 분위기도
행복하지만 혼자 여행하며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시간도 흥에 겹다.
'돌아가면 아내에게도 혼자만의 여행을 권해 보야지.'
습관처럼 생각은 또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가족이기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가족은 고향처럼
우리에게 근원이고 어디서건 돌아가야 할 곳이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가족회의를 처음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권위주의를 싫어하므로
스스로도 '안'권위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고
또 얼마큼은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군대 생활동안,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흩트리지 않고 지켜온 나의 생활철학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가족에게야. 그런데 그런 자존심을 딸아이는 회의 초반에 여지없이 뭉개 놓았다.


딸아이는 나의 TV 채널권 독점을 질타했다. 나는 솔직히 적지 않게 당황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스포츠 중계나
뉴스 정도만 가끔씩 볼 뿐 TV를 잘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딸아이의 만화영화를 위해서는 다 양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불만을 설명했다.

나는 딸아이의 지적에 답변을 해야했고, 답변을 하다보니 변명 같아졌고 비슷한 말들이
계속 오고가면서 부끄럽게도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중재에 나섰지만
나의 말투는 이미 '어른의' 또는 '아버지의' 훈계조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상에. 초등학생인 딸과. 명색이 회의 중에. 딴 것도 아닌 TV 채널권 때문에.
그것도 '안'권위주의자라고 자부하던 어른이 말이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내가 아내와 딸아이에게 또 한번의 밴댕이 사내로 찍히는 순간이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의 시 중에서 -

내가 스스로 지켜온 확신들이 내가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허약한 토대 위에 서있음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러 깨닫는다.
사소한 일에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화 시켜 가는
부단한 노력만이 언제나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자리메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호텔의 식당도 숲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었다.
숙소에서와 같이 온갖 생명의 소리로 꽉 찬 숲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텅 빈 듯한
적막감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여름 소란스러움 속에 내 차례를 기다려야했던 해변가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식사를 마치고 찾은 수영장은 동요
속의 아담한 옹달샘 같았다.
수영이라기 보다는 몸에 물을 적시고 의자에 누웠다.
터진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몸에서 물기가 마르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책을 가지고 갔지만 한 줄도 읽지 않고 게으르게 드러누워 오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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