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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0발리4(끝)

by 장돌뱅이. 2017. 8. 4.

18.발리...발리...발리......
마지막 날이라는, 그래서 저녁엔 발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제까지의 가라앉은 마음과 나태한 움직임과는 달리 아침부터 마음이 들뜨고 공연히 부산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확인하고 확인했던 오늘의 산행 경로를 아침 식탁에서 지도를 펴들고 또 확인했다.

우붓의 차도에서 벗어나 세시간 정도 산자락을 타기로 한 것이다. 지도상에 점선으로 그려진 소로를 따라 호텔
맞은 편의 언덕을 돌아내려올 계획이었다.
나의 모습을 지켜본 듯 식당 종업원이 다가와 어디를 갈 거냐고 물었다.
내가 손가락을 집어가며 설명을 하자 그는 내가 가고자하는 방향과 다른 코스를 추천하였다. 올라간 곳으로

다시 내려오는 나의 원 계획과는 달리 그의 경로는 출발지점과 도착점이 다른 편도의 경로였다.
나는 물론 그의 의견을 따랐다.

여행자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알기 위해서도 묻고, 아는 것의 확인을 위해서도 묻고. 물어서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미 묻는 것 자체도 여행 아닌가? 여행 안내서나 인터넷에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지만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며 정서는 느낄 수가 없는 법이다.

호텔 차는 어제 들렸던 네카 미술관을 지나서도 한참을 북쪽, 서쪽으로 올라간 후 LUNGSIAKAN - PAYOGAN이란
마을을 지나  야자나무가 우거진 길가에 나를 내려주었다. 사방의 우거진 숲을 돌아보고 심호흡을 한 후 나는
길을 걸었다. 지도상의 점선으로 표기된 것에 비해 실제의 길은 제법 넓었다.
야자를 따는 사람들이 아침 인사를
하며 미소를 보냈다.
"슬라맛 빠기"
"슬라맛 빠기"
나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와 미소를 보냈다.

길이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붙으면서 시야가 시원스레 터지고 계단식 논들이 나타났다.
누군가 이 산자락에
이 논들을 만들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년 혹은 수백년에
걸쳐 무수한 사람들이 이 곳에서 땀방울을
쏟았을 것이다.
그 때는 아마 이것이 인간의 노동이 이룩한 가장 자랑스러운 창작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룩해 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신영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는
농업과 농민은 정보화 시대의 휘황한 불빛에서
초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심성 속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 가야할 진정한
문화'는 껍데기만 요란한 장식문화에 밀려 세상사의 관심에선 멀어져 버린 듯 하다.

신동엽 시인의 말처럼 '그렇치 않고서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이곳저곳에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벼타작을 하고 있는 게 보여 다가갔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처럼
발리도 농사는 철저하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논에서 마른 벼를 베어 그 자리에서 커다란 통에 후려쳐
벼알갱이를 털어댔다.
육, 칠십년대 우리의 농촌에서 보이던 발로 밟아대는 탈곡기도 인도네시아에선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간 곳에서는 8명의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한명이고 모두 여자들이었다.

남자는 어디 갔느냐고 하니까 직장에 나갔다고 한다. 나를 놓고 누군가 농담을 했는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났다.
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하니까 이번엔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양말을 벗고 질퍽한 논으로 들어가 벼털기를 자청했다.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마다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볏단을 들어 커다란 고무통의 가장자리에 내리쳤다.
사람들이 건네주는 볏단을 받을수록 까닥없이 기세등등해져서 점점 더 힘껏 내리쳤다.

별안간 한 아주머니가 나를 제지했다. 너무 세게 치면 낱알이 털어지는 게 아니라
벼모가지가 끊어진다며 통 속에서
내가 작업한 것을 꺼내 보였다.
나는 '체험 삶의 현장'인가 하는 TV 프로에서 어설프게 작업을 하여 꾸지람을 듣는

출연자처럼 머쓱하게 웃었다. 


잠시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논 옆을 흐르는 도랑물에 발을 씻었다.
나머지 호텔까지 오는 길은 사방을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는 경쾌한 능선길이었다.
잠자리 떼가 무수히 나는 언덕을 지나면 아담한 마을이 나타나기도 했고 풀을 베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외국인들이 많은 곳이어서인지 사람을 태도가 편하고 자연스러워 나 역시 그랬다.


호텔에 돌아와 맥주 한병으로 갈증을 달랜 나는 다시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짜하야 데와타
(CAHAYA DEWATA) HOTEL로 갔다. 그곳에서
발리에서 가장 큰 아융(AYUNG)강을 내려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발리의 강은 우리나라의 계곡물 수준이다.
호텔
커피숖 창가에 앉으니 멀리 아융강의 계곡을 타고 흘러가며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계곡 주변은 오전 내 산 능선을 걸으며 보았던 모습이지만 새롭게 느껴졌다.
가장 행복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신앙의 예지를 배우는 자라고 하던가?
예지를 배울 수는 없었지만
그냥 숲의 초록을 안주 삼아 두 병의 맥주를 비우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우붓으로 올 적에 나를 태워주었던 발리 택시의 기가 MR.아궁을 다시 전화로 불렀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30분전부터 호텔 앞에 차를 대기시키고 나를 기다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나는 올 때처럼
바다 쪽으로 차를 몰아달라고 요청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GRAND BALI BEACH HOTEL로 가서 사누르(SANUR) 해변을 보았다.

하늘을 덮은 두꺼운 검은 구름이 바다에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변의 모래는 굵고 투박해 보였다. 그
래서인지 사람들은 수영장에 많이 몰려있었다.

SANUR를 나와 나는 NUSA DUA BEACH HOTEL을 찾아갔다.
8년 전 인도네시아에 살 적에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묵었던 곳이다.
해변으로 나갔다.
나는 이곳이 발리에서 해수욕을 하기에 가장 적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어린 아이를 데리고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기에는.
무엇보다 다른 곳보다 바다가 잔잔했다.
모래도 다른 해변보다 고운 편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바다 때문에 발리를 찾을 건 못된다. 바다가 목적이라면 푸켓이 더 아름답다.
발리는 바다'도' 있는
곳이지 바다가 빼어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텔을 돌아 나오며 나는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묵었던 방을 찾아 보았다.
8년 전 이곳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난 아침, 딸아이와 함께 방 뒤편
베란다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여러 마리에게 흰
오리들에게 모이를 주던 생각이 났다.
파란 잔디 위에서 뒤뚱거리던 하얀 깃털의 오리가 무척 깨끗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딸아이 어린 시절의 발리여행 사진 중에서

추억이 있는 곳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고향이란 단어에 목메어 하는 것은
그곳에서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 어귀의 고목나무와 길가에 돌멩이,
작은 고샅길 하나에까지도 때묻지 않은 추억이 스며 있기 때문인 것이다.

멀고 먼 바다를 돌아서 마침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어쩌면 인간에게도
'추억은 본능이며 생명력'인 것이다.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다리쉼을 하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는 천천히 호텔을 나왔다.

*2000년11월 여행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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