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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1발리2

by 장돌뱅이. 2017. 8. 5.

21. 야-야! 바다로 가자
어제 너무 돌아다닌 탓일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뜨니 창문을 가린 커텐 주변의 틈사이로 벌써 밝은 햇살이
밀려들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침이라 더욱 싱싱해 뵈는 초록의 잔디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면 내가 빠뜨리지 않는 행사, 해변 달리기를 시작했다.
동남아에 오면 언제나 해뜨기 전에 달리기를 시작하여 돌아오는 길에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몸을 그대로
바다에 던지곤 했다. 
이 날은 이미 해가 불쑥 솟아 있어 텅빈 운동장을 서둘러 가로질러야 하는 지각생처럼
다소 쑥스러운 마음으로 달려 나갔다.

일단 목표는 6KM의 길이라는 꾸따 해변의 완주를 목표로 했다.
이 세상의 가능한 많은 바닷가에서 달리기를 해보는 것.

그것은 가능한 많은 산을 오르고 싶은 것과 동일한 나의 바램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처럼 무조건 달려 보는 것이다.

내가 묵은 호텔의 유일한,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은 매력적인 해변과 바다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바닷가 쪽으로 호텔을 빠져 나와 북으로 방향을 잡아 수리 중인 까르띠까 플라자 (KARTIKA PLAZA)를 지나
직진을 하면 본격적인 꾸따 비치가 시작되는 하드락 카페 앞에 다다르게 된다. 거기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위 사진은 꾸따의 바다는 아니다. 발리 어딘가에서 찍은 서퍼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아!......
바다는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경험하고 생각해왔던 꾸따의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는 해변을 거의 삼킬 듯 바투 다가와 있었고 초생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긴 꾸따의 해변을 따라
거대한 파도 더미가 줄지어 밀려왔다. 어제 저녁 황홀한 일몰 뿌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바다는
이 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깨어나 가뿐 숨을 몰아쉬 듯 쉴 새 없이 뒤척이고 있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까지 나는 발리의 바다에, 더구나 꾸따의 바다에 매우 인색한 점수를 주어왔다.
그것은 몇 번의 발리행 동안에 꾸따의 바다에 대한 글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지난 여름 어린 조카들과
발리를 찾았을 때도 꾸따는 음식을 먹기 위해 들를 뿐인, 내게 있어서는 보는 바다일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꾸따를 찾은 시각은 늘 오후였던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바다는
시커먼 색깔의 해변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만 요동을 치는 현실감 없는 모습으로 변했고
그 때문에 내게 꾸따의 바다는 정물화같은 풍경으로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상상력은 원래가 허약한 것이라고 하는데 가뜩이나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꾸따의 바다는
늘 멀리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여행 준비를 하느라 읽은 책속에 수없이 나오는 'SURF'란
단어를 흘려 읽었던 것이다.

해변엔 도처에 발리인들이 매일 아침 바다에 바치는 제물인 짜망(CAMANG)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붉은 꽃잎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 왔다. 먼 옛날부터 이미 그들은 꾸따의 바다를 알아보는
지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사각형의 짜망 안에도 그렇게 인간의 삶의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발을 옮겨야 했다.

아침의 햇살과 파도를 동시에 가르며 파도 위를 제비처럼 미끄러지는 SURFFER들의 모습이 경쾌하고 흥겨웠다.
나도 마침내 "야아아아!" 소리 지르며 그 거대한 파도 속으로 힘껏 달려들었다.
바다는 그동안 자신에 대한 나의 '오만과 편견'을 애교있게 질책하는 듯 한 웅큼의 짠물을 먹여 주었다.


22. 덴파사르의 박물관과 사원

한국국제협력단(KOICA : KOREA INTERANTIONAL COOPERATION AGENCY)이라는 정부출연기관이 있다.
우리보다 못사는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발전을 지원하는 단체인 모양이다. 이 단체에서 94년에서 95년에 걸쳐
13개월 동안 "인니 발리섬 도로망건설 타당성조사"를 실시 하였다.
'발리에 대한 관광객 및 교통량 증가 예측과 그에 맞는 도로망 개발'을 위한 조사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발리의 관광 수요는 2000년에는 677만명, 2004년에는 85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고
현재의 도로는 2004년까지는 교통용량에 별 문제점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다.
'다만 2009년부터 꾸따KUTA에서 따나롯TANAH LOT에 이르는 도로의 경우 교통 용량의 한계에 도달하여
교통 소통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동안 꾸따 주변에서 차를 타고 이동을 하며 피부적으로 느낀 해변 이면 도로의 교통량은
이미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상점과 숙소, 식당과 바 등 각종 시절이 밀집된 이 지역은 '누사두아'나 여타의
지역과는 달리 거의 하루 종일 차량으로 심한 혼잡을 이루었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꾸따의 바다와 맨몸으로 씨름을(?) 한 나는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데파사르에 있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꾸따에서 발리의 수도인 덴파사르는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상상외로 차가 막혀 40분
가까이 걸렸다.

내가 여행지에서 박물관은 찾는 이유는 무슨 문화 유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거나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냥 가보는 것이다. 유럽의 이름난 박물관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여행 필수 코스에 들어 있을
정도로 소장품이
화려하다지만, 아시아권의, 그것도 수도에 있는 국립 박물관도 아닌 지방에 소재한 박물관은
대개 작고 초라하다.
따라서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한 경우가 다반사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한적함이 좋다.
그리고 규모는 작고 소장품은 볼품이 없어도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작은 박물관을 볼 때면 그 곳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씨를 보는 듯하여 따뜻한 애정이 솟기도 한다.

덴파사르에 있는 발리의 주립 박물관도 그런 의미에서 나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깔끔하여 좋았다.
전시관 주변에 늘어놓은 발리 여인상들은 하나 같이 그 젖꼭지 부분이 파손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짓궂은
사람들의 장난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석불상의 코처럼 사연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돌불상은 대부분 코가 깨져
있는데 이는 옛날 불상의 코를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데 영험이 있다고
하는 속설 때문이라고 한다.
발리에서는 코 대신 젖꼭지 였을까?

박물관 바로 옆에는 발리주의 사원인 자가트나타JAGATNATHA 사원이 있다.
발리인들의 최고의 신인 SANGHYANG WADI WASA를 모시는 사원으로 신은 사원 중앙부에, 연못의 해자로 둘러쌓인
높다란 연꽃의 제단 위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은 발리의 사원 중에서 행사가 가장 많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 날은 별일이 없는지 박물관처럼 조용하였다.

사원 한쪽의 연단에서 인도네시아의 전통 악기인 가믈란을 연주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수많은 타악기에 둘러 쌓인 채 홀로 앉아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기회를
봐서 말을 붙여 보았다. 할아버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 하면서도 친절하게 나를 받아주었다.
다음날에 있는 사원 행사를 위해서 연습 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나 보고도 직접 쳐보라고 하였다.
덕분에 나는 어린 아이처럼 신나게 이런 저런 악기를 두드려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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