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최후의 날의 뿌뿌딴
박물관과 자가트나타 사원의 도로 건너편은 뿌뿌딴 PUPUTAN 광장이다.
PUPUTAN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 즉 '최후의 결전'을 의미하며 이 의미에는
물리칠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자살을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1906년 이제까지 발리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네델란드 군은 남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덴파사르의 왕궁에 대한 해상 포격을 가했음에도 왕의 저항이 완강하자 네델란드 군은 상륙을 하였다.
왕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뿌뿌딴 대열에 자신과 동참할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대부분의 남자와 많은 여자들이 왕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여자들은 남장을 하였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금으로 만든 전통적인
단도(KRISS라고 하며 발리인들은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음)를 착용하였다.
덴파사르 왕국의 비극적인 최후의 날을 한 기록은 이렇게 전했다.
(1906년 9월 20일 아침) 9시 왕을 앞세운 기이한 행렬이 왕궁을 나섰다. 왕은 신하들의 어깨에
올라 이동하면서 골똘히 그의 앞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만든
단도를 꽉 쥐고 황금 우산을 쓰고 있었다. 창과 칼로 무장한 남자들과 여자들 심지어 어린 소년들까지
대열에 합류하여 말없이 조용히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덴파사르의 남북을 가르는 대로를
따라 KESIMAN 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이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네델란드 군대가 단지 300야드
떨어진 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은 이상한 행렬을 보고 놀라서 정지하라고 명령했다.
발리인 통역관은 왕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걱정스런 애원조로 정지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더 빨리 다가왔다. 100피트, 70피트, 점점 다가오던 그들은 병사들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달려 들었다. 병사들은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고 왕을 포함한 몇몇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흥분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공격을 계속하였고 병사들은 죽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다.
어떤 발리인은 쓰러진 사람 사이를 지나며 단도로 부상 당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가 쓰러지면 즉각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했고 그가 총을 맞으면 다른 늙은 여인이 칼을 잡고 그 피비린내 나는 임무를 수행했다.
왕비들은 왕의 시체 위에서 칼로 스스로를 찔렀고 그들은 곧 왕의 시체 위에서 죽기 위해서 기어온 왕자와
공주들의 시체 밑에 파묻혔다. 공포에 사로 잡힌 병사들이 발포를 중지하자, 여인들은 그들에게 금동전을
던지며 이것이 자신들을 죽인 값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 MIGUEL COVARRUBIAS의 『ISLAND OF BALI』 중에서 -
처절한 이 '전쟁'(학살)으로 덴파사르 왕국은 몰락했다.
왕 자신은 쓰러지기 전에 명상의 자세를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건을 뒤 따라 발리 전역의 다른 왕국에서도 동일한 뿌뿌딴이 계속 되었다 한다.
뿌뿌딴 광장은 그 피비린내의 역사에 바쳐진 기념 광장이다. 그러나 광장 한쪽에 뿌뿌딴을 상징하는 조형물만이
있을 뿐 초록의 넓은 잔디 광장엔 무심한 햇살만이 가득하였다. 뿌뿌딴 광장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는 잠시
한 세기전 항복 대신에 장렬한 죽음을 택한 이름없는 무리들의 행렬을 생각했다.
역사는 꼭 그렇게 숱한 희생을 치루어야 발전하는 것인지. 오늘 발리의 모습은 정말 그 희생에 답할만한 것인지.
문득 연을 날리는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가 광장을 가로지르며 나를 설익은 감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세상에 아이들의 소리처럼 듣기 좋은 것이 또 있을까?
한대수의 노래처럼 '벽에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는 '행복의 나라로' 가는 소리이다.
이미 공중으로 높게 솟아 오른 나비 모양의 연은 바람을 타고 연줄을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그 줄을 잡은 한 꼬마아이가 내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로 오더니 나뭇가지에 연줄을 매었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려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까덱..."
"몇살?"
"열살..."
몇마디 말에 아이는 벌써 친근한 표정으로 나에게 연을 날려 보겠느냐고 물었다.
좋다고 하자 매었던 줄을 다시 풀러 내게 건네 주곤 곧바로 자기 친구들에게로 뛰어 갔다.
그리고 거기서 꼬마아이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더 큰 연을 띄우려고 넓은 광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지표면의 바람이 강하지 않아 연을 일정한 고도로 띄워야만 바람을 태울 수 있는데 연이 크고 무겁다 보니
그게 여의치 않는 듯 했다. 아이들이 달릴 때는 기세 좋게 솟구치던 연은 아이들이 멈추어 서면 비실비실
땅으로 풀어져 내렸다. 어릴 적 겨울이면 나도 참으로 많은 연을 만들었었다.
연 살로 쓰기 위해 멀쩡한 비닐 우산을 찢고 대나무를 갈랐다가 야단을 맞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나는 옛날 생각에 아이들에게로 가 도움을 자청했고 연줄을 잡고 아이들과 함께 뿌뿌딴 광장을 뛰어 다녔다.
서너번 실패 끝에 연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우리는 그 연 줄을 나비연 연줄과 나란하게 묶었다.
나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돌아서며 까덱과 그 친구들에게 과자를 사먹으라며 얼마의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광장을 나와 꾸따비치로 돌아가며 나는 돈을 준 것이 못내 찝찝했다.
차라리 주변의 가게에서 음료수라도 사다 함께 나누어 먹을 걸......
그것은 그 알량한 몇 푼의 돈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주제 넘은 생각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순수한 접근에 너무 '어른들의 방식'으로 응답을 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24. 옛 발리, 새로운 발리
식구들과 여행할 할 때는 못해 보는 것을 '나 홀로 여행'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오래도록 거리를 걸어보는 것이 그런 일들 중의 하나이다. 낯선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아내는 의지는 있으나 몸이 약해 쉬이 지치는 편이고 딸아이는 웬만하면 차를 타지 뭐 할려고 날 더운데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꾀를 피우는 편이라 나는 식구들과 여행을 할 때는 가급적 차량으로 이동을 하는 편이다.
꾸따로 돌아와 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다리쉼을 하고
때로는 가게를 기웃거리며 물건을 구경하기도 하고 흥정도 해보면서 골목몰목을 누비고 다녔다.
『EATING BALI』라는 10년 전에 출판된 책자를 참조했다. 일테면 '10년 전 발리 찾기' 쯤 되는 도보여행이었다.
당연히 꾸따는 책에서 설명한 10년 전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EATING BALI』가 음식, 위생 상태와 분위기에 만점을 준 카페 'THE PUB'은 명성에 비해 웬지 좀 쇄락한 느낌이
들었으며 '발리 최고의 SATAY' 음식점이라고 한 LEGIAN GARDEN은 서구의 취향-'WESTERN TASTE OF BALI'-을
모토로 내걸었다. 종업원은 자신이 일하는 식당이 예전에 그런 명성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인도네시아식만 고집해서는 장사가 안되니까......"
종업원의 솔직한 답변이었다.
BALI'S BEST BURGERS AND BALIE'S BEST MILKSHAKES라는 평가를 받은 YANIE'S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DENNIES란 이름의 미국 프랜차이즈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변했다. 많이도 변했다. 하긴 십년이란 시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이날 내가 식사를 한 곳은 그 책자에 나와있지 않은 KETUPAT이라는 인도네시아 전문 음식점이었고 음식과 분위기와
서비스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10년 전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한 음식점이다. 그렇게 발리는 변해왔고 또 변해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발리 통치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BELIEVE ME, BALI WILL NOT CHANGE. BALI WILL ALWAYS BE BALI. IN THE PAST, A HUNDRED YEARS AGO,
TODAY, AND EVEN A HUNDRED YEARS FROM NOW. BALI NEVER SOLD ITSELF TO TOURISM.
THE BALINESE PEOPLE ARE DETERMINED THAT IT IS TOURISM THAT MUST SUBMIT TO BALI.
TOURISM IS FOR BALI, NOR BALI FOR TOURISM.
- 발리 통치자 IDA BAGUS OKA의 선언, 1991년 -
마치 독립선언문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선언이 나온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어도 발언 자체만를 두고 볼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백년 전과 백년 후의 발리는 결코 지금과 똑같지 않을 것이고 똑같아서도 않되기 때문이다.
혹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리의 정신적인 혹은 문화적인 어떤 것을 강조한 말이라해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토대의 변화에 정신적이며 문화적이라는 어떤 것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리의 역사 자체를 돌아보아도 발리가 세계사의 소용돌이에서 초월하여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신들의 낙원'이 아니었음을 잘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발리는 변할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발리의 독창적인 분위기와 문화를 빼면 발리가 아니 듯이 관광이라는 현실적인 여건을 무시하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발리이다. 한마디로 발리를 위해 관광이 있고 관광을 위해 발리가 있는 것이다.
발리를 영원히 발리답게 만드는 것, 싫든 좋든 그것은 이제 발리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여행자와 관광자본과
발리가 함께 고민하며 가꾸어나가야 할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옛것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올바른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트인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흔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 발리에서 관광이 가지는 의미는 '불'과 같다는 말은 적합한 표현이다.
그것은 발리의 음식을 만들 수도 있고 빌리의 집을 태워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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