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시기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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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여행 그리고 월급쟁이의 수염
넥타이를 풀고 양복과 와이셔츠를 벗어 가방에 우겨 넣었다.
반바지에 소매없는 티셔츠로 갈아 입고 신발도 구두에서 운동화로 바꾸어 신으니 비로소
출장에서 여행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다. 업무가 예정보다 늦어져 자카르타에서
발리로 올 때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느라 미처 정장 차림을 벗어버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불가불 발리 공항의 화장실을 탈의실로 이용해야 했다. 화장실에서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는 동안 드나드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가벼운 눈인사와 웃음을 나누었다.
옷이라는 것이 때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바꾸어 놓는다. 점잖은 사람도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면
종종 민간인(?)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 않는가. 아침에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멜 때 느꼈던 가벼운 긴장감은 넥타이의 매듭과 함께 사라지고 안락함과 흥겨움이 드러난
팔뚝에서 종아리까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공항의 물품보관소에 맡길 물건과 4일의 여행동안
가지고 다닐 물건을 나누다 문득 면도기가 눈에 들어왔다. 주저없이 보관용 가방 속으로 넣어버렸다.
짧은 며칠 동안 이지만 수염을 깍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굉장한 자유처럼 느껴져 또 기분이 좋아졌다.
홍대 앞에서 카페를 하는 한 지인을 볼 때마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그의 수염이다.
내가 수염을 기르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이방(吏房)형' 수염이 부러워 할만큼 '폼이 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의 수염이 부러운 것은 그것이 이 땅의 '고전적인' 월급장이들로서는 쉽게 꿈꿔 볼 수 없는
자유라는 생각에서이다. 자유에 대한 의미를 기껏 수염에서 찾는 것이 우스운 발상이라 할지 모르지만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인데 어쩌랴. 근래에 들어 자유분방한 업종에서는 복장과 개인 용모에 대해
너그러운 곳도 있지만 아직 대부분의 회사에서 사규에 나와 있지 않은 수염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완고하다.
때문에 일요일 하루 수염을 깍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에도 의미를 붙여대곤 하는 나로서는 4일이란
'한 세월'동안의 자유인 것이다.
이래저래 여행은 가볍고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다. 하루에 5,500루피아(0.6달러)하는 보관소에 출장용 짐을
맡기고 공항을 나설 때 어깨가 가벼워진 것은 꼭 짐이 줄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공항을 나와 베모를 타고 꾸따해변으로 갔다. 우선 골목안에 있는 포삐스POPPIES 식당에 들려 망고 쥬스를 시켰다.
발리에는 아름다운 식당들이 많다. 포삐스도 그런 식당 중의 하나이다.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주변으로 식탁들이
아담하게 배치되어 있다.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은 열대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다리쉼을 하기에 편안하고 친절한
종업원들의 옷차림이 그네들의 미소처럼 깔금해서 좋다. 론리플래닛과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앞으로의 일정을 대충 잡아 보았다.
이번엔 발리의 동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몇 차례의 발리행을 주로 남부와 중부 위주로 하였기에
동쪽으로는 브사끼 사원을 빼고는 가본 적이 없는 초행길이다. 발리의 동쪽은 남쪽에 비해 관광지로서 개발이
안 된 곳이다. 그래서인지 론리플래닛에도 지면 할애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이번 여행 역시 업무 출장 중 지난번 처럼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이라 사전준비와 조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때그때 하루치만의 일정을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일단 빠당바이PADANGBAI 까지만 간다' 는 목적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 대한 큰 부담감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방현석의 소설에 나와 있던가.
'낯설음은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 놓인 절반쯤의 기대와 절반쯤의 불안'이라고.
'어느 정도 낯설음이 없다면 새로운 시작의 설레임은 없을 것'이라고.
28.빠당바이로 가는 길
스마라푸라 SEMARAPURA는 꾸따KUTA에서 발리의 수도인 덴파사르 DENPASARE와 기아냐르 GIANYAR를
지나 빠당바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옛 도시이다. 원래의 이름은 끌룽꿍 KLUNGKUNG으로 지금도 현지인들
사이에선 스마라푸라라는 이름보다는 끌룽꿍으로 불리우고 있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 무렵에야
끌룽꿍에 도착한 나는 입장 시간이 지났을까 봐 조급한 마음으로 옛 끌룽꿍 왕조의 최고 법정인 꺼르따고사
KERTHA GOSA 에 들어갈 수 있었다.
꺼르따고사는 연못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아름다운 끌룽꿍왕조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작은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서면 화려한 천정의 그림이 보인다. 발리 힌두교에 바탕을 둔 다양한 형태의 죄와 벌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꺼르다고사 옆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대단한 볼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08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뿌뿌딴에 대한 약간의 자료와 그림이 있었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만남이라고 흔히 말하던가?
내가 꺼르다고사를 돌아보고 빠당바이로 가는 길가에 있는 LOJI RAMAYANA 호텔에 들어가 진한
발리 커피를 마시며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작고 조용한 호텔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언제 들어왔는지
서양 아저씨 두 명이 뒷쪽 테이블에 앉아 말을 걸어 왔다.
"니혼진데스까?"
그들은 숙박을 하러 들어온 것이다. 나는 빠당바이로 갈 것이라고 하니까 좋은 곳이냐고 묻는다.
나도 초행길이라 잘 모르나 론리플래닛에는 그렇게 씌여져 있다고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마침 책에는 빠당바이의 전경을 찍은 칼라 사진도 있었다. 그들은 별안간 호텔의 예약을 취소하고
자신들도 나를 따라 가겠다고 나섰다.
PETER MCWHINNET. 호주인이며 현재 일본 교토에 거주.
SOREN BISGAARD. 덴마크인이며 역시 교토에 거주.
어쩐지 코 큰 사람들이 일본말을 쓰더라니......
그들은 차를 렌트하여 10일째 발리를 돌고 있으며 발리의 토산품을 사러 다닌단다. 비스꼬는 앞머리가
벗겨진 50대의 중년으로 반쯤 남은 머리를 길러 뒤통수에 밤톨만한 꽁지로 만들어 붙여 다소 희극적으로 생겼다.
한마디를 물으면 열마디쯤의 대답을 하는 수다성이었지만 붙임성이 있어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36살의 노총각 피터는 상냥하긴 하나 필요한 말만 하는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빠당바이에 도착하여 우리가 처음 찾아 간 곳은 론리플래닛이 칭찬을 해놓은 또삐인 TOPI INN이였다.
그러나 책의 설명과는 달리 TOPI는 쇄락한 모습이었고 밤마다 라이브 키타의 연주와 때때로 발리춤의
공연까지 있었다는 식당은 이미 폐업을 한지 오래된 모습으로 탁자와 의자가 함부로 방치되어 있었다.
비스꼬는 바로 이런 때문에 자신은 여행 가이드북을 믿지 않는다며 오직 지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은
직접 현지에서 눈으로 확인하며 여행한단다.
아뭏튼 모든 론리플래닛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와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여행안내서를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THINGS CHANGE - PRICES GO UP, SCHEDULES CHANGE,
GOOD PLACES GO BAD AND BAD PLACES GO BANKRUPT
- NOTHING STAYS THE SAME.
그러나 난 그래도 가이드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지에 대한 개념 파악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지난 시간과 대비하여 변화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되는 것도 여행 중에 느끼는 잔 재미 아니겠는가.
출판이라는 속성상 인터넷의 신속한 정보를 쫓아 갈 수는 없다하더라도 여행자에게 오로지 최신의 정보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행은 여러 가지 목적과 형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한 학술적인 탐사 여행이 목적이 아니고
휴식의 의미로서의 가벼운 여행이라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꼭 거대한 것일 필요는 없다.
하늘의 별, 싱그러운 바람, 구름, 종업원의 미소, 숙소의 간판, 도로의 포장, 버스 운전수의 친절 등
뭐 그런 작은 것들이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다. 대단한 이념과 사상만이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아니다.
작고 구질구질한 먼지, 때, 그리고 상처, 낮잠과 한잔의 커피와 잡담 등도 삶의 많은 부분에 자리메김하고
있으며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의미 부여가 많을수록 삶이 풍요로와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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