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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1발리2

by 장돌뱅이. 2017. 8. 7.

29. 빠당바이의 밤
우리는 또삐 인 TOPI INN에서 발걸음을 돌려 PADABGBAI BEACH INN의 방갈로 하나를 십만루피아(11불)에
하룻밤
숙소로 정했다. 발리 전통 가옥 형태로 지어진 방갈로는 일층은 샤워시설과 의자가 있고
잠은 3개의 침대가
있는 이층에서 자게 되어 있었다. 외부 모습보다 내부는 다소 허술하였으나
하룻밤 자는 것인데 뭔 문제가 되랴.
비스꼬와 피터는 내 덕분에 좋은 곳에 오게되었으니 나는 3만루피아를
내라고 하고 자신들 둘이 나머지를 내었다.
우연한 만남이 잠자리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저녁은 해안도로변의 까페 꺼르띠 CAFE KERTI에서 했다. 바닷가이니 여러 가지 생선 튀김 바비큐 등을 시켰다.
나오는 음식마다 맛이 훌륭했다. 여럿이 여행을 하는 것은 적어도 식사를 할 때는 좋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분위기가 즐겁다. 역시 밥은 나누어 먹는 것이란 말은 맞는가 보다.
CAFE KERTI는 바다를 마주한 2층의 건물이라 시원한 바닷바람이 식사시간 내내 불어와 주었다.
3사람의 식사와 디져트, 그리고 얼큰해질 정도의 술값을 합친 금액은
137,500루피아(15불)였다.

비스꼬는 해외 여행 경험이 많아 보였다. 스리랑카와 인도등지에서의 경험담을 유머러스하게 해주었다.
특히 일본에서 살면서 겪었던 지진 경험에 대한 표현은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경험해보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별안간 집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마루바닥이 물처럼 변해 발이 푹푹 빠지고......"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상상력이 흔히 보잘 것 없는 것이라면 절실하게 경험한 일에 대한 표현력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되나 보다. 우리는 가게문을 닫는 종업원과 함께 카페를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선가 탱크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축을 흔드는 캐터필러의 굉음이 꿈같이 아득한 곳에서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웬 탱크일까? 아니야 지진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까지 흔들릴 수가 없어.

"집이 춤을 춘다? 지진 그래 맞아 지진!"

눈을 뜨자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탱크와 지진이 어둠 속에서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있었다.
비스꼬가 잠을 자면서 코로 만들어내는 대단한 '개인기'였다.
사람의 코에서 저런 엄청난 소리가 날 수 있다니.
어떤 소설 속의 표현대로 증기기관차 한 대가 칙칙폭폭 온 방안을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설핏 들었던 잠이 깨자 한참을 뒤척여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와 해변으로 나갔다. 바다 쪽에서는 여전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가늘고 긴 발리의 배들은 해변으로 끌어 올려진 채 잠들어 있었고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에 따라 머리카락처럼 흔들리는 야자나무 잎 사이로 구름과 달이 번갈아 지나갔다.

이 작은 포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여객선이 창마다 불을 환하게 밝힌 채 길고 굵은 바리톤의 고동소리를
흘리며 먼 바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육중한 배의 외곽은 점점 어둠 속에 흐려지고 멀리 작은 불빛으로 남았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떠나간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이제는 이 세상에서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죽음. 지난 여름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께서 떠나신 후에 유품도 같이 정리를 했었는데 아직도 가끔씩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어머님의 물건이 눈에 띄곤 한다.
단정하게 개어진 양말이라던가 생전에 드시던 약이며 무엇보다 어머님이 계시던 방에서 아내와 나는 아직도 어머님의 체취를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때마다 새롭게 서럽다. 언젠가 무뎌지겠지만 내 가슴 속에 그 일은 아직은 얇은 딱정이만 앉아있는 쓰린 상처이다.


아득하게 멀고 문득 가까운 사람의 인연이여. 세상의 사랑하는 계집과 사내가, 다정한 부부가,
화목한 가정이, 친한 벗들이,
얼마나 장구한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취산의 인과가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꽁깍지처럼 스스로의 뜻이 아니리.
슬픔과 아픔은 잠깐이며, 산 자는 밥 먹고 코 골며,
죽은 자는 풀 아래 썩나니, 이제 흩어진 사랑하는 계집과 사내는 저마다
다른 지붕 다른 이부자리에서,
또는 먼 저자에서 자기 석 자 남짓 육신이 겪는 언저리의 생활에 관한 꿈을 꾸며 잠들었고녀"

                                                                                                   - 황석영의 장길산 중에서 -




30
.빠당바이의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을 거닐다 숙소로 돌아오니 바스꼬가 콧노래를 부르며 세면장에서 얼굴을 닦고 나오다
가볍게 인사를 한다. 멀쩡한 폼이 간 밤의 자신이 저지른(?) '지진'이나 '탱크 운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이다.
말을 해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코파와 비코파'란 소설이 있다. 대학 교수들이 합숙을 들어갔는데 하루를 자고나자 코를 고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와 결국 코를 고는 코파와 코를 골지 않는 비코파가 나뉘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비코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여 자는 방에서도 코고는 소리가 나더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허물엔 관대하고 사소한 남의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세태에 대한 풍자인 듯 했다.
나는 아직 자각을 못하지만 최근 들어 나도 코를 곤다고 한다. 보통 때는
괜찮은 데 술을 많이 먹거나 피곤한 날이면 아내의 수면을 방해할 정도로 코를 곤다고 아내가 말해 주었다.


*위 사진 : 빠당바이 해변


비스꼬 일행과 커피를 마시며 나는 오늘 하루의 일정을 논의했다. 그들은 발리 원주민들이 사는 발리 아가 BALI AGA
마을을 먼저 방문한 뒤 내가 오늘 저녁 묵으려는 띠르따강가TIRTAGANGGA를 거쳐 우붓UBUD으로 간다고 했다.
발리 아가나 띠르따강가가 내가 가려는 곳과 일치하여 그들의 렌트 차량으로 편하게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딱히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는 나로서는 천천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어 그들과 헤어졌다. 여행이 흔히 삶과
비교되는 이유는 그것이 목적(지)에만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또한 의미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헤어지기 전 나는 그들에게 작은 인삼차 한상자를 주었고 그들은 내게 코코넛나무로 만든 젓가락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손님 접대용으로 쓸 목적으로 산 것임을 알기에 사양하였더니
자기들은 나중에 우붓에서
또 사겠다고 하며 굳이 내 가방에 넣어준다.
그들과 헤어지고 혼자서 빠당바이의 해변을 따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보았다.
아무 계획도 할 일도 없다는 것은 언제나 가볍고 나른하고 감미롭다.

포구를 감싸고 있는 한 쪽 언덕 위에 힌두 사원이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마다 제물을 이고 힌두교 사원 쪽으로 스쳐 지나간다.
무심코 빠당바이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롬복에서 왔단다. 롬복? 뱃길로 네시간이나 걸리는데서?
롬복에는 사원이 없느냐고 하니까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곳까지 왔느냐고 하니까 뭐라 길게 설명을 해주는데 내 인니어 실력의 한계를 넘어서 잘 알 수가 없다.
롬복은 이슬람이 많고 발리는 힌두교가 많은 섬이니 그와 관련된 사정이나 연유가 있는 것일까?


신에 대한 경건한 숭배와 건강한 노동과 흥겨운 노래와 춤의 축제가 있는 곳. 누가 발리를 지구 최후의 낙원이라
불렀다면 그것은 꾸따비치의 바다와 노을 때문만이 아니라 발리인들의 생활에 염두를 둔 말일 경우에 옳다.

발리의 관광화와 상업화를 들어 시비는 접어두자. 이 지구상 어디에 상업화지 않은 전통이 남아 있는가?
발리인들의 생활은 겸손하고 평화롭고 아름답다. 야만과 오만은 언제나 밖에서 왔다.

빠당바이는 발리와 롬복을 오가는 훼리와 누사페니디아 NUSA PENDIA 섬을 오가는 배들이 있는 작은 항구 마을이다.
들고 나는 배들의 고동소리가 가끔씩 조용한 마을를 흔들어 놓지만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나는 훼리터미널 부근 정거장에서 베모가 오기를 기다렸다. 베모는 발리의 미니 버스이다.
우선은 11KM 정도
거리에 있는 짠디다사CANDI DASA부터 가기로 했다.
거기서 암라푸라AMLAPRA를 경유하여 띠르다강가로 갈 예정이었다.


론리플래닛에는 빠당바이에서 외국인 여행객들이 통상적인(현지인과 같은) 차비를 내고 베모를 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씌여 있었다.

"SADLY, THERE IS SOME FORM OF TRANSPORT MAFIA IN PADANGBAI."

차비 몇 푼 더 내는 것을 두고 '마피아' 라는 과장된 수식어에 동조를 할 필요는 없겠다.
여러 명의 운전자들이 자신의 차를 세를 내라고 다녀갔지만 나는 물을 사서 마시며 끈질기게 오렌지색 베모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마침내 3000루피아(400원 정도)를 내고 베모에 오를 수 있었다.
거리에 따라 틀리겠지만 베모를 타고 가면서보니
현지인들은 대략 나의 3분의 1 정도를 내는 것 같았다.

베모에는 독일의 스투트가르트에서 온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 BIRGIT SAUTER 한 명이 타고 있었다.
호주에서 시작해 혼자서 한달째 여행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빠당바이를 베이스로 해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며
짠디다사에서 스노클링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짠디다사를 가는 중이라하니 반가워한다.
아침에 헤어진 비스꼬처럼 코를 골아대는 노인네와의 만남도 즐거웠는데 젊은 미녀와의 동행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한결 시원하게 느껴졌던 것은 꼭 바람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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