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아이처럼 살다

by 장돌뱅이. 2015. 5. 15.

맑은 바람이 부는 산에 오르면 온 몸의 묵은 찌꺼기가 바람에 실려 빠져나간다.
꽃에 얼굴을 가까이 하면 그윽한 향기가 가슴과 영혼에까지 가득해진다.
그것이 설혹 일시적인 착각이라고 해도 여운은 일생을 관통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서울도서관에 이오덕과 권정생, 그리고 일본인 하이타니 겐지로의 삶을 돌아보는
전시회 “아이처럼 살다”가 열리고 있다.
그들 삶의 공통 주제는 아이들과 문학과 자연이다
.

이오덕과 권정생은 내게 학창 시절이래 낯익은 이름이다.
권정생은 어릴 적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동화작가이기도 했다.
이전에 이 블로그에도 두 사람(의 책)에 관한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 이오덕 :
http://jangdolbange.tistory.com/682
- 권정생 : http://jangdolbange.tistory.com/756

1층의 전시관에는 그들의 육필 원고와 사진, 그리고 책들이 있고
4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벽에는 그들이 살다간 내력이 붙어있다.

10년의 나이 차이에도 문학적 동지이자 친구로서 이오덕과 권정생은 30년의 우정을 나누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그 자체로 한편의 동화 같다.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 
                                           -1983년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교회종지기와 주일학교사로 지내며 교회 문간방에 살던 권정생에게
마을 청년들이 작은 집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위 사진 : 이오덕과 권정생의 만남(1973년) - 사진 출처 한국일보


*위 사진 :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

일본인 하이타니 겐지로는 내게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그가 앞의 두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벽에 붙어 있던 그의 말은 그대로 맑은 바람이고 향기로운 꽃이었다.

   나의 인생에는 세 가지 이상이 있습니다.
   글을 계속 쓰는 일,
   아이들과 계속 함께 살아가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노동으로 일해서 자급자족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는 암 판정을 받았으나 자연에 맡긴다는 생각으로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서도 여러번 읽어보게 되었다.
‘향기 나는’ 유서라고 해도 형용모순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분들께
   아무래도 명이 다할 때가 가까워진 듯합니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내 마음을 전해 두려 합니다.
   들판의 나비나 잠자리처럼 살다 죽고 싶습니다.
   삶은 그렇지 못했지만 죽음은 자연에 맡기고 싶습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배운 것은 무집착의 사상,
   다시 말해서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배워 온 그대로 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삶에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조금은 있을지도).
   죽음을 무턱대고 멀리하지 않고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때로는 죽음도 축하할 일이라는 생각이 나는 더없이 좋습니다.
   나의 단 한 가지 바람이라면, 머잖아 찾아올 나의 죽음을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여준다면 고맙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덧붙이면, 어떤 혹독한 현실에서든 자신과 타자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있으며 희망을 잃지 않은 채 이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 발 먼저 갑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장례식이나 추모회 등은 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럼 언젠가 저 세상에서 만나 뵙지요.

그의 유서에서 암 판정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던 이오덕이나
죽을 때  “용감하게 죽겠다”는 유서를 남기며 죽음 앞에 당당했던 권정생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위 사진 : 지난 13일 저녁 서울도서관에서 열렸던 강연회 "이오덕은 어떻게 살았을까"

혼탁한 세상이다.
길은 어둠에 갇혀 이젠 그리고 벌써 희미하다.
언제부터인가 오늘은 어제와 같이 낡고 진부하다.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라는 냉소와 절망이 앞장을 서기도 한다.
그럴 때 제 자리를 지키며 빛나는 하늘의 별들은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반성과 함께 위안을 준다.

시간을 내어 이오덕과 권정생과 하이타니의 삶에 귀를 기울여보자.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세제민  (0) 2015.06.16
마늘까기  (0) 2015.06.14
브런치 그리고 샌디에고  (0) 2015.05.12
옮겨 온 글 "이름을 불러주세요"  (0) 2015.04.21
4월18일 세월호 추모집회  (0) 2015.04.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