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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8 - 수원 화성과 행궁

by 장돌뱅이. 2015. 10. 26.

수원 화성 걷기는 화성 행궁에서 시작했다.
화성행궁은 정조 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 때 머물던 곳이다.
건립 당시에는 600여 칸의 조선시대 최대 행궁이었다고 하나 일제 강점기에 원형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진 복원공사를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헌에 의거하여 정확히 복원되었다지만 새로 지어진 만큼  오래된 고궁에서 느낄 수 있는
해묵은 연륜의 편안함 대신 텔레비젼 세트 같은 새물내가 강한 곳이었다.
실제로 대장금를 비롯한 여러 사극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행궁 옆쪽을 걸어 팔달산 꼭대기에 올랐다. 수원성의 총 지휘부라 할 수 있는 서장대가 있었다.
"이 산 둘레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자리에서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화성성역의궤』)
문헌의 기록대로 서장대에서는 수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서장대에서 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의 둘레길은 5.7km.  높낮이의 편차가 크지 않아 편히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 화서문


↓장안문 : 화성 북쪽의 정문이다.


↓ 장안문 근처의 보영만두에서 군만두와 찐만두로 점심을 했다.
보영만두는 수원에선 이름이 알려진 듯 KT의 홈구장인 수원야구장에도 입점했다는 소식지가 붙어 있었다.


↓화홍문은 화성을 관통하는 수원천의 북쪽 수문이다. 문 아래 7개의 수문으로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흐른다. 옛날에는 화홍관창(華虹觀漲) 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다는 풍경인데,
아내와 내가 갔을 때는 가뭄에 물줄기가 마른 탓인지 그다지 좋지 않은 냄새가 풍겨왔다.

화홍문에서 성곽 둘레길에서 벗어나 잠시 성안쪽으로 들어오니 행궁동 벽화마을이 있었다.
좁은 골목길의 담장에 그려진 이런저런 그림은 그다지 세련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서투름이 어릴 적 추억인양 정감이 있어 보였다.

개발과 함께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풍경 중에 골목이 있다. .
직선의 큰길이 생활의 동맥이라면 골목은 삶의 바탕이 되는 실핏줄일 것이다.
골목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반가운데 주민들 스스로 그림까지 그리며 가꾸고 있다니 고맙기까지 하였다.

다시 성곽 둘레길로 들어섰다.
1794년(정조18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2년 여만에 완공된 수원성은 당대에 가능한 모든 능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만든 다양한 형태의 목조 건물과 벽돌 시설이 집약된 곳이다. 나라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집중된 국가적인 사업이었던 만큼 당대 최고의 전문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석수, 목수, 나장이(미장이), 와벽장(벽돌 굽는 장인), 야장(대장장이), 개장(기와를 덮는 장인),
거장(수레를 만드는 장인) 등등 모두 22 직종에 1,840명의 장인들이 공사를 맡았다.
승려들도 뽑았다. 승려 장인들은 대부분 건물에 단청을 맡았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 있는 그 시절 장인들의 이름은 '권력'의 문자(한자)와 실생활의 언어와의(한글) 간격을 보여준다.
당시 서민들의 이름이었던 작은놈, 큰놈, 개똥이 같은 이름을 문서에는 崔者斤老味(자근노미), 安大老味(대노미),
金介同(개동) 식으로 적었다고 한다. 高乭金(돌쇠), 車於仁老味(어떤놈), 嚴江牙之(강아지), 金順老味(순놈),
李福乭(복돌) 같은 이름도 있다.


↓수원성의 남쪽 정문 팔달문에서 걷기를 마쳤다.
완전히 성을 한바퀴 돌려면 아직 좀더 걸어야 했지만 대신에 우리는 팔달문 근처 시장을 걸어보았다.
이곳의 시장은 계획도시인 수원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정조시대에 시행된 정부 시책에 시원을 두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을 리 없지만 시장의 떠들석하고 부산한 분위기는
옛날 삼남대로가 서울에 이르기 전 숨을 고르며 풀어놓았을 옛 시장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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