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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 9 - 서울 자문밖 부암동

by 장돌뱅이. 2015. 10. 30.

자문밖은 구기동, 부암동, 신영동, 평창동, 홍지동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지명으로
과거에 자하문(창의문
) 근처에서 거주하건 사람들이 자하문 밖을 가리킬 때 '자문밖'이라는
줄임말을 사용했던데서 기인한다.
지금은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 분위기 있는 카페와 음식점 등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되었다.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본 자문밖


윤동주문학관은 정확히 자문밖이 아닌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
(紫霞門 혹은 창의문 彰義門)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수도물의 압력을 높여주는 가압장이었다가 사용이 중단되어 방치된 건물로 
2012년 종로구가 개조하여 문학관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라고 한다.

문학관은 아담한 흰색 건물로  출입구 계단 위에 윤동주문학관이라는 글씨도
작고 색도 도드라져 보이지 않아 차분한  윤동주 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시실은 3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전시실에선 윤동주에 관한 자료실이다. 그가 읽던 책의 표지들과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제2전시실은 가압시설로 사용할 때 물탱크가 자리로 직원의 설명으로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 에 나오는 우물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의 길 끝부분은 제3 전시실인 영상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윤동주 일대기에 관한 영화를 상영해 준다. 


문학관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윤동주시인의 언덕' 이라 이름 붙인 작은 언덕이 있다.

언덕에 오르면 멀리 남산을 배경으로 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새긴 시비도 있다.
공원처럼 잘 다듬어져 있어 날씨 좋은 날이면 짧은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게 허공에 시선을 두기에 편한 곳 같았다.

「서시」,「별헤는 밤」같은 널리 알려진 시 이외에 개인적으로 나는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를 좋아한다.
시에 나오는 정거장이나 어쩌면 이곳 언덕에서 서성거릴 때 젊은 시인은 어떤 희망과 사랑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젊은 날 무엇을 기다리며 지냈던가 떠올려 보게 된다.
나의 회상은 종종 부끄러움으로 향하지만
그래도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왠지 위안 같은 것을 얻곤 한다.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털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었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사랑스런 추억」-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스물아홉이란 젊은 나이가 가슴을 더 애잔하게 파고든다.

부암동 라갤러리에서는 박노해 시인의 인디아 사진전 "디레 디레"가 열리고 있었다.
디레디레는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의 인디아 어라고 한다.
인디아 사람들이 소박한 모습과 짧게 붙인 설명의 말들이 잠시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더디 가더라도 함께 손잡고 나아가기를
   께 가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기를

   자유란 홀로 선 외로운 나무가 아니라
   '함께 하는 혼자'로 숲을 이루는 푸른 나무인 것이니

갤러리를 둘러보고 같이 붙어 있는 라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헤겔은 "자기 시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고, 그 의지가 무엇인지를 그 시대에 전달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을, 즉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을 행하는 사람"을  그 시대의 '위인'이라고 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윤동주와 박노해의 치열했던 삶이 그 어름에 있지 않을까?

요즈음 역사 문제로 시끄럽다. 이미 다 정리된 문제인 줄 알았는데 
다시 또 이런 문제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정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의지'와 '정수'와 '본질'은 결국 독립과 민주화(민주주의)로 요약된다.
그 거울에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보면 자명해질 일이다.

서울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과는 다른 미술관이다. 서울미술관의 운영주체는 석파문화원이고
서울시립미술관은 당연히 서울시일 것이다.
확연히 구분이 되게 차라리 서울미술관은 석파미술관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서울미술관에서는 3 가지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술관 일층에서 위로 올라가며 순차적으로 보게 되어 있었다.

먼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전.
전시 안내 팸플릿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순환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정취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공간과 인생의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이 날 서울미술관에서는 최근에 작고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중의 하나,  연녹색 개구리들이 생동감과 청량감을 주었던 첫 전시관의 「개구리」(1970년대 작).


그리고 황재형의
겨울」(1996년작). 
유홍준씨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2권에서 황재형 작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그림을 보는 나의 눈이야 어차피 무지에 가까운 아마추어이므로 그 글에서 느껴지던
황재형이란  화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감동은 충분했다. 

   화가 황재형은 지금도 태백의 황지에 살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약관의 나이로 영예의 차석상(장려상)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 그는 광부복 하나를 극사실 수법으로 그려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예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든지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황재형은 이내 스스로 광산촌의 화가가 되고자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황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껏 막장인생들의 벗이 되고 동지가 되어 거기에 살고 있다.


다음은 "가장 행복한 화가, 이대원"이다.

2005년에 작고한 화가 이대원에게 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걸까?
색채가 유난히 화려하고 단순한 구도에 붓질이 자유분방해 보여 사람을 신명이 나게 만들어 그럴까?
아니면 화가가 '나는 행복합니다'를 유난히 크게 노래 부르며 살았을까?
그러나 그가 좋아하던 노래는 "과수원길"이란 동요였다고 한다.
전시회에서도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의 그림은 전두환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전두환 추징금 환수를 위해 압류한 미술품 속에 그의 작품 「농원」이 들어있었고
경매에서 6억 6,000만 원이란 최고가에 낙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과나무 (2000년작)


맨 위층의 전시회 이름은 "미인".
"미는 우리가 신에 대한 의문을 조금도 갖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매우 훌륭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라는
주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몇 장이 이곳에 있었다.

강렬한 색채의 이국적인 화풍, 꽃과 여인, 그리고 뱀은 천 화백의 상징과도 같다.
"미인"전에 걸린 그림에서도 그랬다. 

「 청춘 」( 1973작)
「 청혼 」( 1989작)
「 팬지 」  (1973작)
고(孤) ( 1974작)
테레사수녀 (1977작)

천 화백은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 논란은 지금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의
진실게임 속에 숨은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중섭이나 박수근, 이우환 화백의 위작 논란과는 얼마나 다른 형태일까?

전두환에게서 압류한 미술품 중에도 위작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시기에 전두환에게 팔았는지 모르겠지만 '간덩이'가 제법 큰 위작자가 아닐 수 없다.
하긴 사는 사람은 몰랐으니 샀을 테지만 파는 사람도 진품 여부를 몰랐을 수도 있겠다.

"미인"전의 마지막엔 아래 사진과 같은 설문조사표가 있었다.
가정의 평화를(?) 고려하여 나는 5번 빈칸에 보란 듯이 아내의 이름 '곱단이'를 적고 체크를 했다.


서울미술관과 이어지는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를 말한다.

별서는 요즈음 말로 하면 별장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원군이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아는 바 없지만
별장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가을빛으로 물든 담장 위의 감과 계곡 정자 주변의 나무들을 보며 아내와 호젓한 산책만으로 
그런 주인장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의 일부를 공짜로 나눌 수 있었다.


석파정 안에 중국풍의 특이한 정자가 있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풍광을 바라보는 누대'라는 뜻의 유수성중 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라고 한다던가.
안내판의 설명을 옮겨본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 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로,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김흥근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조여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정자에 남아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문양과
   평석교의 형태 드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 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 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부암동 산책의 마지막은 자하손만두였다.
개운하고 담백한 맛의 만둣국을 아내와 고개를 끄덕이며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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