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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11 - 샌디에고에서 대천까지

by 장돌뱅이. 2016. 1. 10.

샌디에고에서 8년 가까이 생활하는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종교 - 천주교를 갖게 된 일이다.
극단의 무신론자였던 내게 어떤 극적인 전환점이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을 가기 전부터 아내와 종교에 대해 가끔씩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이국에서의 생활이 그런 논의에 좀 더 빠른 마침표를 찍게 해주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천주교의 선택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가까운 이웃이 소개를 했고 그래서 일단 한번 가본 것이 시작이었다.
 
지루.따분.엄숙.근엄.진지 등의 단어들로 예상되던 교리 수업.
게다가 일주일에 한번이라지만 6개월씩이라니!
수업의 첫날 성당으로 가는 차안에서 아내에게 왠지 모를 쑥스러움과 불안감(?)에
나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였다.
"만약 교리수업이란 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주제라면 다음 주부턴 안 갈 거야! "

그러나 장구한 세월처럼 부담을 주던 6개월은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금방 지나갔다.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 수녀님의 강의가 감각적인 시간을 짧게 해주었던 것이다. 
수업중 가끔씩 낭독해주는 시를 듣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아내는 그런 수녀님을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마리아수녀에 비유하였다.

나의 세례 소식에 누구보다 놀란 건 딸아이였다.
"이건 말도 안돼.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수녀님이 무척 미인이었다던가 하는......"
그렇게 나의 종교적 신심(?)을 의심하던 딸아이는 얼마 후 한번도 우리 부부가 강요하거나 추천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교리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둘이 서로 이해할 수없는 일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신자가 되었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분"의 현존을 의심하는 날나리 신자이다.
의심뿐만 아니라 불평불만도 빼놓지 않는다. 아내는 내가 따를 수없이 앞서간다.
성경을 통독하고 필사(신약)도 하더니 요즈음은 매일 한번씩 묵주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수녀님은 우리보다 몇년 앞서 귀국을 하셨다.
작년 연말 실로 오래간만에 충남 대천에서 수녀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여행을 계획한 것은 패트릭님과 카타리나님 부부.
패트릭님은 우리 부부가 샌디에고에서 교리를 받을 때  예비신자들인 우리와
수녀님을 도와주던 '조교'였다. 지금은 유럽 쪽에서 근무 중이다. 
그가 연말 휴가로 귀국한 차에 함께 대천으로 수녀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패트릭님은 요즈음 세상에 드물게 보는 조용하고 겸손한 품성의 사람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교리수업의 교실 안이었지만 그와 만난 것은 교리자 야유회가 끝난 자리였다.
그때 그는 모두 돌아간 뒤에 공원에서 야유회가 남긴 뒷정리의 허드렛일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세상엔 그런 사람이 있다. 표시나지 않는 일을 남 모르게 하는. 
최근에 가끔씩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그의 변모를 두고 아내는 나의 악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쒸! 이건 좀 억울하지만  나는 수긍을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패트릭님이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최악의 욕이 "나쁜 놈!"이라고 하니 내가 이길 수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나는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욕을 평상어로 뱉고 다니는 수준이다. 
 



이른 아침 용산역에서 두 가족이 만났다. 일년 반만의 만남.
아내와 카타리나님은 대천까지 가는 내내 
그 시간 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직접 차를 운전하고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수녀님은 단골 간장게장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식사하는 도중에도 수녀님은 변함없이 시원시원 거침없고 활달하셨다.
덕분에 교리를 받을 때를 떠올리며 내내 흥겨울 수 있었다. 
 


식사 후 대천에서 가까운 천주교 다락골성지를 방문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났고 계절도  한 겨울이라 그런지 다락골성지를 찾은 사람은 우리 뿐이었다.
발걸음소리가 울릴 만큼 고요하고 한적했다. 높지 않는 산줄기에 둘러쌓인 다락골 성지의 위치와
함께 성지 내 현대적 감각의 성물과 장식 소품도 친근감이 있고 따스해 보여 좋았다.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가며 성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최양업신부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다가왔다.
 



뭔가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던 팔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아내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역사의 격변기를 통과하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사람들의 흔적은 언제나 우릴 숙연하게 한다.
동학혁명의 분기점을 이루었던 우금치나 광주 망월동의 무명전사의 무덤과 같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 다락골의 교인들은 집단으로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황급히 37기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줄무덤을 돌아보고 나니 저녁 때가 되었다.
수녀님은 우리를 숙소로 데리고 가 직접 저녁 식사를 지어주셨다.
정갈하고 맛난 밥상.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패트릭부부의 따님 효정님도 탄복을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수녀님께서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다.

90년 대 초  인도네시아에서 주재를 하고 돌아와 우리 가족은 국토여행을 시작한 바 있다.
첫 해외생활이 주었던 향수가 우리로 하여금 국토에 대한 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선 그때처럼 특별히 국토여행을 게획하진 않았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다시 한번 국토여행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성지 순례"라는 주제의.

아내와 나는 그 우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에게는 책 제목대로 "성지를 따라 가는 국토 순례"의 의미이고
나에게는 '국토 여행 속의 성지'겠지만 뭐 어떠랴.
"그분"은 너그러운 분이시니 나의 작은 앙탈이나 위악쯤이야
눈 감아 주실 뿐만 아니라 넉넉한 평화의 시간을 열어주시지 않겠는가.

   영암사 들머리
   신령스런 기운이 돈다는
   육백 년 넘은 느티나무 밑에서

   아내한테 말했습니다

   "여보, 이렇게 큰 나무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일년도 안 된
   작은 나무 앞에 서 있어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 서정홍의 시,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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