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12 - 카톨릭 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by 장돌뱅이. 2016. 5. 6.

예비신자 시절 아내와 나에게 교리 수업을 해주셨던 은사 수녀님을 작년 12월에 찾아뵈었을 때 수녀님께서 위 사진 속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란 책을 선물로 주셨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취미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새해 들어 아내와 나는 그 책을 참고로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2백여 쪽의 책 속에 천주교의 성지는 전국에 걸쳐 있었다. 다 돌아보자면 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게다가 가급적 대중교통과 도보를 이용하기로 했으니 더 그럴 것 같았다.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속도전'으로 돌아볼 이유는 없겠다.

순례의 첫 장소는 "카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으로 잡았다. 학교 안에 있는 관계로 외부인은 방학 중에만 방문이 허락된다고 하여 제일 먼저 가게 되었다. 그때가 지난 1월이었으니 늦은 여행기다.

1. 명륜칼국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혜화동과 성북동 일대에는 이름난 칼국수집이 많다.
"명륜칼국수"와 "혜화칼국수", 그리고 "국시집"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아내와 나는 한성대입구역 근처의 "국시집"을 가장 좋아한다.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는 날이면 빠짐없이 들리곤 한다. 이번엔 "카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서 가까운 "명륜칼국수"로 정했다. "명륜칼국수"의 맛은 명성에 어울릴만 했지만 아내와 나의 입맛에는 역시 "국수집" 우세였다.

방학을 맞은 카톨릭 대학의 교정은 한산했다.
교문에서 성당을 오고 가는 동안 만난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교정에 있는 김대건신부 동상.
성당에는 김대건 신분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카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중에서 -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오는, 19세기 후반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조선의 지배 권력은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지배 질서에 대한 민중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었다. 지배층은 이런 대내외적 위기를 내부적으로는 왕권 강화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한계에 다다른 유교적 지도 원리에 눌린 빈중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는 지배층에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진보적인 정치 세력에 대한 탄압도 의미하고 있었다. 천주교는 조선의 상황과 정서를 무시하고 편향된 교리를 내세워 탄압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1846년 김대건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무슨무슨 '양요(洋擾)'.
같은 시기를 천주교에선 종종 무슨무슨 '박해(迫害)'로 부른다. 현실 역사와 종교 역사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주교 성지를 돌아보며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겠다. 

학림다방은 대학로에 얼마 남지 않은 옛 흔적이다.
LP판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다방 안에는 늘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감성 - 따뜻함과 포근함,
그리고 반드시 무겁지만은 않은 진지함이 이 다방에 들어서면 느껴진다.
입구에 어느 문학평론가의 글이 붙어 있다.

 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쯤 어디서간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학림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학림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 게임은 아주 집요하고 완강해서 학림 안쪽의 공간을 대학로라는 첨단의 소비문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 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학림다방을 나와 서울대병원 쪽으로 향하는 길가에 한 농민의 비극적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보성에서 농사를 짓던 백남기님은 쌀값(81kg) 21만원을 보장해 주겠다던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다가 공권력의 물대포를 맞고 수 개월이 지나도록 의식불명의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위 사진 : 임옥상의 그림 "상선약수" 중 일부

화가 임옥상은 지난 겨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리얼리즘 복권"전에 이 '물대포' 공권력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내놓았다. 크기 220 *720 cm의 사실주의적 대작이었다.
목탄으로 그린 흑백의 그림은 격렬하고 처절한 현장과 현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특이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화가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가장 좋은 물'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자비한 '대포'로 쓰는 타락한 시대를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날 마지막 방문지는 광희문이었다.
옛날 서울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이 문으로 내가서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쪽으로 운반해 매장했으므로 속칭 시구문(屍口門)으로 부른다. 또는 청계천의 수구에 가깝고 남산 북동쪽 일대의 물이 이 문 부근을 통과해 빠져 나갔기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한다.

도성 안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을 통해 성 밖으로 버려졌을 것이다.
버려진 시신은 가족이나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거나 혹은 성 밖에 그대로 묻혔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광희문 관련 순교자는 김임이(데레사), 우술임(수산나), 정철염(카타리나) 등이 있다고 한다.
광희문 바로 옆에 순교현양관이 있었다.
마침 미사가 열리고 있어 잠시 참석하는 것으로 첫 성지순례를 마쳤다.

성지 순례라고 했지만 사실 성지 '밖'으로 분심이 뻗친 일정이었던 것 같다.
왠지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예감이다. 성지는 어디나 세상을 지나거나 세상과 함께 있고 여행은 목적지만이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