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산후 조리 때문에 한달 정도의 예정으로 집에 와 있는 중이다.
밤낮으로 수발을 들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손자 녀석이지만
가끔씩은 긴 잠에 빠지면서 우리에게 한가한 저녁시간을 선물처럼 주기도 한다.
(그 깊은 적막과 한가로움이라니!)
오래간만에 아내와 딸 그리고 나 이렇게 '옛' 가족 셋이 한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는 시간.
아기가 있으니 그럴 때 화제는 종종 딸아이의 어린 시절에 집중된다.
딸아이를 키우던 당시와 지금 손자와 같은 점과 다른 점 비교도 해보고,
평상시에는 그렇게 싫던 회사 야간 숙직이 밤마다 울어대는 어린 딸아이 때문에
은근히 반갑고 기다려지기까지 했던 그 시절 나의 비겁한 이기심도 고백하고
(이미 오래 전에 아내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지만^^)
'공갈젖꼭지'를 물자 울음을 그친 딸아이를 보고
"공갈젖꼭지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젊은 새댁이었던 아내의 말도 다시 끄집어 내보는 등등.
어느 이야기나 반복해도 새 이야기처럼 즐겁다.
그럴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딸아이와 함께 한 산행이야기다.
88년 가을, 올림픽 개막식이 있던 날 회사 동료와 울산 인근의 간월산행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겨우 네 살배기 딸아이가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떼를 썼다.
높은 산이라고, 너처럼 어린애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달랬지만 꺽을 수 없어
결국 "절대 다리 아프다거나 힘들다고 업어달래면 안 된다"고 수십 번의 다짐을 받고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런데 산초입에 들어서 아직 경사길이 채 시작이 되기도 전에 딸아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기발한 재치로 나와 동행인을 거의 기절시켰다.
"아빠, 나 다리는 안 아픈데 졸립다."
그러니까 '계약 조건'에 졸린다는 조항은 없으니 업어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어린 딸아이가 끝까지 걸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대략 오르막길의 4분의 일이라도 걸으면 그 다음부터는 업어야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빨리 '계약 문구'상의 헛점을 예리하게 파고든 어린 딸아이의 영악한 지략에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 이후에도 딸아이는 산에 가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서는 타고난 체력이 좋았던지 실제로 잘 걷기도 했다.
물론 산행 도중에 아내와 나는 딸아이의 씩씩함을 부풀리는 칭찬 릴레이가 활력소 기능을 한 점도 있다.
반대로 아내는 딸아이에 앞서 힘들다고 엄살을 부려 딸아이의 상대적 우월성을 키워주었다.
딸아이가 우리집 등반대의 대장이라는 명예를 수여하고 산행 내내 대장님으로 자주 불러 주기도 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모든 산에는 게으름뱅이 언덕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중간에 힘이 들고 가기가 싫어지면 그곳이 바로 게으름뱅이 언덕이라고 했다.
거기를 넘어서야 우리는 게으름뱅이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을 해주었는데 생각보다 딸아이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어린 딸아이의 순수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딸아이는 밥을 먹고 난 뒤에는 한참동안 절대로 누운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밥을 먹고 누워서만 지낸 게으름뱅이가 어느 날 벌을 받아 소가 되었다는
동화를 아내가 읽어주고 난 뒤부터였다.
↑ 밀양 재약산 자락에 있던 고사리학교.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딸아이가 여섯 살(만으로 다섯살)때 우리 가족 셋은 나의 친구 한 명과 함께 밀양의 재약산을 간 적이 있다.
원래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표충사 인근에서 하룻밤을 자고
뒷날 아침 일찍 오를 계획이었으나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아직 저녁 햇빛이 남아 있어 길을 앞당겨둘 생각으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층층폭포 위 민박집까지는 두 시간 정도의 거리라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오르는 도중 밤이 되어 불을 켜고 좁은 산길을 일렬로 서서 걸어갔다.
역시 대장인 딸아이를 맨 앞세웠다.
가는 도중 딸아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파리가 있어서."
"무슨 파리가?"
불빛을 비추어보니 무슨 날타리 같은 것이 날아다녔다.
파리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모기도 아닌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모기야. 그냥 가."
나는 별 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산행을 계속하자고 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움직이질 않았다.
하는 수없이 내가 선두로 나서야했다.그런데 딸아이와 순서를 바꾸려다 나는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말았다.
흙길에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그대로 앉아 헛웃음을 웃으려는 순간
반바지 차림이어서 맨살이 드러난 다리종아리가 바늘에 찔리는 듯 따끔거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할 틈도 없이 아내도 비명을 질렀다. 동행의 친구의 짧은 비명도 이어졌다.
날타리는 파리도 모기도 아닌 벌이었던 것이다.
땅벌!
나는 딸아이를 안고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벌의 추격권에서 벗어난 듯 했다.
어두운 길을 모두 넘어지지도 않고 달린 초능력이 놀라웠다.
천신만고 끝에 민박집에 도착했다. 주인아저씨가 "그 망할 놈의 벌이 하필 등산로에 집을 지어놓고
등산객들에게 행패를 부린다"고 하며 "그러지 않아도 내일 아침에 벌집을 파낼 참이었다"고 했다.
벌 때문에 놀랐던 딸아이는 금새 명랑함을 되찾았고 민박집에서 확인해보니 벌에도 쏘인 흔적이 없었다.
어른들만 훈장처럼 몇 군데씩 쏘였으나 다행이 큰 탈은 없었다.
아래 글은 산행을 다녀와 당시의 딸아이가 우리 가족의 여행기 노트에 쓴 글이다.
<나는 오늘 산에 간다. 근데 후레시를 키고 밤에까지 간다.
근데 모기가 많이 있어서 선다. 근데 아빠가 빨리 가라고서 아빠가 먼저 가다 너머졌다.
근데 아빠는 벌집을 건드려다. 아빠는 아 따거워 아 따거워 하며서 뛰어갔다.
아빠는 벌인데 모기라고 한다. 아빠 친구도 간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가게에서 자고 이러나니
닭들이 있고 염소도 있었다. 근데 한 닭이 죽으려고 했다. 불상하였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말한다고 한다.
문득 재약산 산행도, 손자 녀석의 편안한 잠과 덕분에 낡은 노트 속 어린 딸의 기록을 찾아
그때를 낄낄거리며 회상하는 지금 이 순간도 모두 화양연화에 닿아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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