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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베트남

2005하노이3 - “베트남의 별” 호치민(胡志明)

by 장돌뱅이. 2012. 4. 17.

'베트남의 별’이란 표현은 프랑스인 쟝 라꾸뛰르 JEAN LACOUTURE라는 사람이 쓴 『호치민』의 한국어 번역판 제목이다. 여행기의 제목으로 인용하고 보니 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현실적인 거리감과 이미지의 상투성이 호치민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바꾸려다가 다시 남겨두었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전설처럼 보이고 어린아이처럼 순박하여 오히려 상투적으로 보이는 호치민의 삶에 별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붙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호치민 묘소는 시원스레 트인 바딘(BA DINH) 광장과 접해 있다. 바딘광장은 1945년 9월2일 베트남 독립선언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묘소 앞에는 흰 색의 제복을 입은 근위병이 정지된 자세로 보초를 서고 있다. 묘소로부터 일정거리에 제한선을 설치해 놓고 그 안으로 진입하는 사람이 있으면 짙은 녹색의 제복을 입은 또 다른 군인이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나도 아내와 광장을 거닐며 묘소 건물로 무심코 다가가다 그 선 앞에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책에서 읽은 바로는 방부처리한 호치민의 시신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곳이라는데, 이 날은 그렇지 않은 날인지 아니면 별도의 입장 시간이 있는 것인지 입장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묘소 주변은 한산했다. 아내와 나는 애초부터 묘소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 없었기에 묘소 외관과 가끔씩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광장 한 쪽에 앉아 있었다.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원래 이름은 우옌뚜얻타인이었으며 1917년 응우옌아이꾸옥(阮愛國)으로 개명했다. 바뀐 이름에서 호치민의 생각이 읽혀진다. 그 후 1942년 중국에서 ‘빛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찌민 胡志明으로 다시 개명을 했다. 공식적인 이름 외에도 그는 여러 해 동안 수많은 나라를 떠돌며 추적을 피해 수십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뒤크루와 JOSEPH DOCROUX는 호치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했고 세속적인 즐거움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활발하게 행동하고 늘 긴장하고 있었다. 항상 그를 따라 다니며 그의 마음을 일생 사로잡고 놓아두지 않았던 하나의 이상은 그의 조국, 베트남의 일이었다고 나는 지금까지 믿고 있다. 물론 그에게 국제주의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참된 혁명가였으며 그런 그에게 있어서 베트남은 최대의 문제였다. 그의 행동과 일의 중심에는 항상 베트남이 있었다.

- 쟝 라꾸뛰르의 책, 『베트남의 별』 59쪽 -

그는 치밀하면서도 대범했고 단호하면서도 유연했으며 무엇보다 헌신적이고 진솔했다. 이른바 “내 안의 변하지 않는 것으로 주위의 많은 변화를 대처한다(以不變 應萬變)”는 원칙으로 인도차이나의 복잡한 국제적 역학 관계를 현실적으로 풀어갔다.  ‘불변’인 민족독립을 이루기 위해 ‘만변’의 방식으로 경직성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주요한 적”에 관하여 중요한 점은 대상을 양자택일하여 한 가지에 고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은 변하는 것이다. 즉 호에게 있어서 그것은 때로 프랑스 식민주의자이고, 일본의 군국주의자이고, 중국의 점령세력이며 미국 제국주의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항상 적이 누구인가를 올바로 식별하는 일이며 “주요한 적”에 대하여 다른 세력의 힘을 빌어 대항한다는 것이다.

- 쟝 라꾸뛰르의 책, 『베트남의 별』93쪽 -

 중국과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원조 식민국인 프랑스와 손을 잡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다. 그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고, 100만의 군대와 태평양전쟁에서보다 더 많은 폭탄을 쏟아 부은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쟁취한다. 그는 결연히 외쳤다.

“우리가 당신들 한 명을 죽일 때마다 당신들이 우리를 열 명씩 죽인다 하더라도 끝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는 그를 가리켜 “레닌과 간디가 역동적으로 결합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는 완전한 승리를 눈앞에 둔 1969년 9월 3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을 유언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사각의 육중한 건물 속에 방부 처리된 시신으로 영원히 누워있게 되었다.

*위 사진;주석궁의 모습.

묘소 가까운 곳에 그가 머물렀던 집과 집무실이 있었다. 노란빛으로 외관이 도드라져 보이는 식민지 시대의 총독관저 건물은 1946년 호치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잠시 기거하여 주석궁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호치민은 국민들처럼 평범한 주택에 살고 싶다며 주석궁에서 나와 연못 옆에 작은 집으로 옮겨 집무를 보았다.
집무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머문 곳이라기엔 너무 소박해 보였다.
검은 농민복과 지팡이, 샌들, 책 몇 권······

*위 사진: 1954년부터1958년까지 호치민이 살았던 집

베트남국민들은 그를 각하나 대통령, 주석 따위의 권위적이거나 의례적인 이름으로 부르기보다는 ‘호 아저씨’라는 뜻의 친근한 “박호”라고 부른다고 한다. 호치민 이외에 어느 정치지도자가 국민들로부터 사후에도 오래도록 이렇게 아름다운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지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평생을 허름한 의복과 단출한 주거공간을 고집하고, 적이 겨누는 총구의 표적물이 되어 긴박한 삶을 살았지만 늘 따뜻하게 국민들을 위로하며, “국민과 함께 먹고 국민과 함께 일하며 국민과 함께 산다 ”는 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한 지도자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이며 영예가 아닌가 한다.

아내와 나는 거대한 묘소와 공원처럼 가꾸어진 호치민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죽어 호사(?)를 누리는 호치민보다 그와 같은 지도자를 둔 베트남사람들이 부러웠다.
솔직히 우리 현대사의 어느 지도자를 ‘아저씨’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겠는가?
떠오르는 얼굴들에 아저씨란 호칭을 붙이려다보면 낯이 화끈거려온다.
어쩌면 그들이 먼저 아저씨란 호칭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눈을 부릅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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