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베트남

2016 '첫' 여행6 - 호치민

by 장돌뱅이. 2016. 7. 6.

방콕 수안나펌공항에서 일주일간 태국에서 시간을 함께 했던 일행과 헤어졌다.
그들은 유럽행 비행기를 탔고 우리는 호치민으로 향했다.

호치민은 아내와 내게 처음이다.
십년 전 쯤 북쪽의 하노이를 여행한 것이 베트남 여행의 전부였다.
그동안 동남아 나라 중에 베트남과는 일로도 여행으로도 잘 인연이 안 닿았다.

인도네시아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잠시 베트남 프로젝트가 논의되다가
없어진 뒤로는 이상하게 베트남으로는 단품 수출의 기회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첫 하노이 여행시 아내의 몸 상태가(베트남 음식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
그 뒤로 여행 후보지에서 항상 뒷전으로 밀린 데다가
장기간의 미국 주재가 이어지면서 재 방문의 기회가 없어진 탓이었다.


* 위사진 : 비행기에서 본 호치민의 야경


*위 사진 : 베트남 건국의 영웅 호치민의 얼굴이 새겨진 베트남 돈.
             미화1불이 2만동을 상회하니 기본 단위가 크다.
             여행 중 내가 가져 본 가장 큰 액수의 돈은 오십만 동 짜리였다.


 
이튿날 아침 혼자서 호텔 주변을 걸었다.

여행 때마다 매일 아침 하는 일이지만 이 날의 산책은 지도를 보며 했다. 
당일 방문지로 잡고 있는 통일궁, 전쟁박물관, 노트르담성당, 중앙우체국, 벤탄시장 등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여행 준비 과정에서 지도상으로는 익숙해져 있지만
초행이다 보니 현장 확인은 필요했다. 주변 도로의 이름과 지형물을 지도와 대조하며 대강의 방향을 잡았다.

초행의 여행지에서 아침 산책은 그런 실용적인 의도를 넘어 여행 자체이기도 했다.
낯선 도시의 거리와 사람과 공기와 소리가 주는 생경함은 어떤 설렘이나 기대감을 부추기는 법이므로.

숙소의 앞은 광장이었다.
호치민 동상이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인민위원회 건물(호치민시 시청)을 등지고 서 있었다.
호치민이 '주석'이나 '대통령' 따위의 정치적 직함이 아닌 '박 호(호 아저씨)' 라 불린다는 이야기는
그런 친근한 정치적 지도자를 갖지 못한 우리에겐 부러움이 된다.





10여 년 전 하노이를 여행할 때 아내와 나는 하노이 시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이 내는 소음을 두고
'하노이 오케스트라'라고 부른 적이 있다. 호치민에서도 그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여전했다.
그때의 하노이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오토바이는 여전히 차도 위에 군림하듯 소란스럽게 달리거나 
자주
인도를 가로 막고 쉬고 있었다. 어떨 땐 인도라기 보다는 오토바이 주차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있는 신호등의 초록빛이나 횡단보도에서도 보행자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건너야 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는 아직 권리가 아니고 참고사항일 뿐이야."
호치민에서도 그 '연주'는 여전했다. 그때의 하노이 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오토바이는
여전히 빠른 움직임으로 차도를 장악했고
쉬고 있는 오토바이도 종종 인도를 가로 막고 있었다.
인도라기 보다는 오토바이 주차장이라는 표현이 맞을려나?

가끔씩 있는 신호등의 초록빛이나 횡단보도에서도 보행자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건너야 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는 아직 권리가 아니고 참고사항일 뿐이야."
-"2016년 호치민 여행기" 중에서 -
호치민에서도 그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여전했다.

그때의 하노이만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오토바이는 여전히 빠른 움직임으로 차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쉬고 있는 오토바이는 종종 인도를 가로 막고 있었다.
어떨 땐 인도라기 보다는 오토바이 주차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있는 신호등의 초록빛이나 횡단보도에서도 보행자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건너야 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는 아직도 권리가 아니고 참고사항일 뿐이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숙소 맞은 편에 있은 유니언 스퀘어를 지나 호치민의 대표 쇼핑가라 불리는

동커이 거리 DONG KHOI STREET를 따라 걸었다.
여느 대도시와 다르지 않은 세련되고 호화스러운 외양의 거리였다.

 

중앙우체국은 동커리 거리에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을 건설한 에펠이 설계를 했다고 한
다.
1891년에 지어졌다는 건물은 입구를 들어서면 높은 아치형 천장에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기념으로 엽서 한 장을 사서 손자에게 글을 썼지만 주소를 잘못 기입하여 부치지는 못했다.
손자는 요즘 우리 부부 최고의 관심사다.
여행 틈틈이 딸아이가 보내주는 손자의 사진과 동영상을 확인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위 사진 : 중앙우체국 내외부.


중앙우체국 길 건너에 노트르담성당이 있다.
이름에서 보듯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성당이다.
붉은 벽돌로 몸체를 이룬 성당은 날렵하고 경쾌해 보였다.
내부는 미사 시간에만 입장을 허용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베트남전쟁 시기 남베트남의 인구의 11%가 카톨릭 신자였다. 불교신자는 약 80%였다.
그러나 카톨릭은 남베트남의 정부·군·관료 권력을 장악했다.
군 장교의 50% 이상이 카톨릭이었다. 절대 권력의 대부분도 카톨릭에서 나왔다.
카톨릭은 교육과 사회적 기회를  장악했기 대문에 모든 국가 운영의 엘리트를 형성했고
카톨릭 정권이 하는 일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그들은 극단적인 반공세력이기도 했다. 
카톨릭이 서양(비민족) 지향적이었음에 비해 불교도는 토착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이영희의 글)

물론 종교의 갈등이 베트남 전쟁의 본질은 아니다.

역사적·사회적·경제적 내외적 모순이 종교라는 양상을 통해서도 드러난 것일 뿐이다.
호치민에 거주하는 아쿠아 회원이기도 한 "하늬바람"님의 말에 의하면
베트남 정권이 수립 후 카톨릭에 대한 정치 보복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포교 활동에는 제약이 따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위 사진 : 노트르담성당

원래 성당 이후에 통일궁을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1100 부터 1300까지는 휴식시간이었다. 
근처에 있는 전쟁박물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맨 마지막 순서였던 벤탄시장을 먼저 가야 했다.

벤탄시장은 세워진 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시장 그대로의 모습 - 냄새와 소음, 번잡함과 활기 - 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다녀가는 지 옷가게 쪽에서는 한국말로 가격을 말하기도 했다.
아내는 여기서도 손자 옷을 만지작거렸다.



통일궁은 식민지 시절 총독 관저로 세워져 이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이
있는 대통령궁이 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실, 외빈 접견실, 등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1975년 4월 30일 이 대통령궁에 '민족해방군'의 탱크가 들어오고 5월1일에는 남베트남정부의 대통령이 
'해방군' 대표에게 항복을 하면서 긴 베트남전쟁은 끝이 났다. 이후 남북의 대표자들이 1975년 11월 21일
이곳에서
국가통일을 결정하였다. 현재 이곳의 공식 명칭은 통일궁 REUNIFICATION PALACE 이다.
통일궁 역시 역시 우리의 현대사가 가지지 못한 역사이자 현장이다.


*위 사진 : 통일궁 전경




*위 사진 : 대회의장 CONFERENCE HALL(위) 앞에는 1975년 11월 남북의 대표들이 통일국가를 수립을 결정하는 
             흑백사진이 붙어있다.
            
아내는 베트남 국수(음식)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먹는 자리에서 굳이 사양을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먹고 싶은 음식에 넣지는 않았다.
지난 하노이 여행에서 나쁜 인상(음식 위에 있던 바퀴벌레, 그것을 보여주어도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던 직원,
그 때문인지 모를 배탈)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 베트남 여행에서 내가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다.
아내의 베트남음식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가끔식 먹기도 하여 그나만 친숙한 '포'(퍼?베트남어 발음은 태국어보다
어려워보인다.)를 첫 메뉴로 골랐다.


식당 포호아(PHO HOA, 260C PASTEUR)의 국수.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세웠다.
이 식당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퍼보'와 우리가 미국에서 자주 먹던 '남베용'을 시켰는데,
둘 다 좋았지만 우리는 역시 '남베용'이었다.
국수 속에 들어 있는 수육은 별도로 판매해도
한국인들에게 인기 메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태국여행을 같이 하고 유럽으로 돌아간 일행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까지 우리가 먹은 월남국수는 가짜!"



식사를 마치고 갈 예정이었던 전쟁박물관은 뒷날로 미루어야 했다.
아내가 지쳐했기 때문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아내는 휴식을 취하고 나는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호치민에 살고 계시는 하늬바람님과 마니또님 부부를 만났다.
한국에 있을 때 아쿠아 카페와 마장동 고깃집(?), 그리고 2004년 쯔나미 직후 태국 푸껫여행에서도
우연히 마주쳤던 인연이 있는 부부였다. 우리는 서로의 자식(딸)들의 성장에 놀라움을 표했다.
푸켓에서 보았던 하늬바람님 부부의 어린 딸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우리 딸은 결혼하여 아이 엄마가 된 것이다. 
머물지 않는 시간과 세월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부부가 안내한 훔 HUM은 나중에 보니 유명 채식식당이었다.
채식을 좋아하는 아내에겐 특히 안성맞춤이었다.
 






가족과 함께 경험한 두 번의 해외생활을 통해
이국에서 아이교육과 일을 병행하며 정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하늬바람님 부부도 호치민에서 십년이 되었다니
그동안 남에게 얘기하지 못할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도 변함없이 여행도 잘 다니며 활기차게 생활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행복하시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