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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베트남

2016 '첫' 여행7 - 호치민

by 장돌뱅이. 2016. 7. 9.

아침 산책.
전날과는 달리 방향 가늠을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한? 산책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냥 어제와 반대인 사이공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으로 다다르기 전 마지막 대로는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무한정 돌진해오는 오토바이 행렬 때문이었다.
횡단보도는 있었지만 어제 파악한 것처럼 '참고 사항'이었고 신호등은 보이지 않았다.

갈 때보다 돌아올 때가 왜그런지 더 힘이 들었다.
오토바이 행렬의 간격은 더 촘촘해져서 그 사이를 비집고 나갈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나의 약점을 눈치 챈 씨클로가 다가와 타고 건너가라고 제안을 해왔지만 거절을 했다.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길을 건너기에 좀더 나은 곳을 찾다가 건너편을 보니 같은 처지에 놓인 서양인 두 명이 보였다.
우리는 손을 흔들어 서로 격려를 하며 발걸음을 차도 속으로 디뎌 나가기 시작했다.
길 중간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GOOD LUCK!"을 외치며 나머지 길을 건넜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거르고 미루었던 전쟁박물관 WAR REMNANT MUSEUM 을 향해 출발했다.
아직 아내의 컨디션도 완전치 않은 데다가 어제 저녁 과식 탓인지 그다지 식욕이 나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곳 한 곳만을 다녀와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구찌터널 반나절 투어는 언제 있을지 모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장소 하나를 더 가보고 안 가보는 것에 여행의 성패가 달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행은 성패를 겨루는 일도 아니다. 

전쟁박물관의 원래 이름은 '미국 전쟁 범죄 박물관 MUSEUM OF AMERICAN WAR CRIME'이었다.
미국과 수교 후에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더불어 전시물에도 변화가 생겨 미군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알리는 전시물의 강도가 많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와 나에겐 지금의 전시물만으로도 전쟁의 잔인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가끔씩 신음을 뱉었고 아내는 차마 전시물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자주 외면을 하곤 했다.

베트남전쟁.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른 수단'이란 폭력의 극한적 행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미군은 2차세계대전의 두 배가 넘는 폭탄을 베트남에 퍼부었다.
더불어 수백 척의 함정과 만 대가 넘는 항공기, 상주 병력 55만의 압도적인 무력을 투입했다.
베트남전쟁 동안 3백만명의 베트남인이 죽고 4백5십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고도 미국의 완벽히 패배 - 명분도 없고 실리도 잃은 전쟁에 대해 미국은 스스로가 말하 듯
"후손들이 던질 왜?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만 남게 되었다.
워싱턴DC의 베트남전쟁 전몰자 추모비 VIETNAM VIETERANS MEMORIAL 에는 
전쟁에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58, 26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적어도 몇 년 전 아내와 내가 방문해했을 때까지는 그랬다.
질문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답변이 마련되지 않은 것일까?

올해 3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하여
"나라마다 주권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크거나 작은 나라인지와 상관없이 영토는 존중되어야 한다."며,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들을 괴롭혀서는 안된다." 고 말했다.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말이라 생각되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어째 좀 '거시기' 해보인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왜'라는 질문은 이유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위한 '정언명령'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에 미군 개입과 전쟁의 확대를 주도한 "반공 십자군적 강경론자가
군부의 장성이나 제독이 아니라 일개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라는 사실은
베트남 전쟁사의 한 중요한 사실(史實)이 되어 있다."(이영희)

그는 존슨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씨빌리언그룹' CIVILIAN GROUP)으로 불리는 월가의 경제인 출신들이
군부보다 미국 대외 전쟁에서 강경론자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쟁의 확대를 주장한 이들도 그들이었다고 한다.
단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100년 미국의 이익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위 사진 : 전쟁박물관 전시 사진 (미군의 고엽제에 폐허가 되어버린 숲속?에 서 있는 맨발의 베트남소년)
             
 


*위 사진 : 전쟁박물관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요소가 뒤범벅이 되어 전개된" (이영희)
베트남전쟁을 사람들은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했다.
상처......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송중기 주연의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다시 한번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며
아시아의 많은 나라로 수출되었다. 그중 베트남에서는 '태양의 후예'의 수입 전에 논쟁이 있었다.
한국군이 해외에서 (정의롭게) 싸우는 전쟁 드라마를 베트남인들이 보아야 하는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베트남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우리와 베트남 사이에는 정리해야 할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는 의미겠다.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
   흉칙한 장갑차와 

   고문기구와 사형틀 앞에서도
   호치민대학의 여학생은
   웃음이 밝다
   아열대의 키 큰 나무들을
   배경으로 서서

   구에서 몰려드는
   거지들 사이에
   두 팔이 잘린 중년이 섞여 있다
   상이군인이다 

   맹호부대나 
   백마부대가 주둔했을 때
   그는 어데 있었을까

   호주머니 속에서
   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
   내 손에
   땀이 배었다
         - 신경림의 시, 「전쟁박물관」 -



3층의 전쟁박물관을 층마다 돌고 나오니 아침을 거른 배가 헛헛해 왔다.
그래서 찾아간 곳.
어제는 PHO에 '성공'했으니 오늘은 반미 BAHN MI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마이반미 MY BAHN MI (57 Ngyuen Du street Ben Nghe District 1). 

반미는 바게트빵을 갈라 그 속에 여러가지 소스와 채소 고기등을 넣어 먹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퓨전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외국 여행자들에게 알려져서 그런지 영어가 통하는 젊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먹은
반미도 역시  '성공' -  아내의 만족이었다.
아내의 만족은 자동적으로 나의 만족을 의미한다.





내친 김에 베트남의 커피도 한잔해야 했다.
하일랜드커피는 베트남 유명 로컬커피점이라고 한다.
아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는 커피'쓰어다'를 주문했다.
커피'쓰어다'는 미국에 있을 적 그냥 베트남커피로 알고 마시던 커피다.
커피에 연유가 들어가 단맛이 강한 아이스커피다. 
커피맛을 모르고 단맛을 즐기는 유아적 수준의 내 입맛에는 딱이다.





숙소로 돌아와 오후 내내 수영장 놀이를 했다.
휴식을 취하던 아내도 점차 기운이 회복되어 수영을 했다.
수영을 하는 동안 비가 소나기가 지나갔다.
우리는 개의치 않고 개구장이가 되어 보았다.



저녁은 숙소에서 가까운 템플 클럽 TEMPLE CLUB에서 했다.
원래 불교 사원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중국풍의 장식이 강하지만 음식은 베트남음식이다.
격조 있고 은은한 분위기. 이런 곳에 오면 기분 좋게 나른해진다.
훌륭한 음식과  고급스런 분위기에 비해 가격은 무척 저렴했다.
여행지로서 베트남이 가진 경쟁력이다.

식사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간 태국여행 일행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제까지 우리가 먹은 스프링롤은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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