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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23 - 대구 시내를 걷다1

by 장돌뱅이. 2017. 7. 12.

국내여행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사전 계획이나 번거로운 예약 절차 없이 불쑥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구로 향했다. 가는 차 안에서 대구를 검색하며 공부를 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 당일치기 그것도 몇 시간 머무르는 여행으론 소화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넘쳐났다.
팔공산이나 비슬산, 동화사나 갓바위를 제외하고 대구를 여행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울산에 거주할 때도 부산은 갔지만 이상하게 대구로는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이제까지 대구행은 결혼식 하객이나 초상집 조문객으로 갈 때 뿐이었다.
이제까지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보는 것도 이유가 될까?

동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성로로 향했다.
대구의 영화관, 쇼핑몰, 카페 등이 밀집한 최대의 번화가.
서울 사람들에겐 대구의 '명동'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평일인데다가 한낮이어서 마치 파장의 거리처럼 그냥 휑한 거리였다.
불이 밝혀진 상점과 북적이는 인파를 상상으로 빈 거리에 대입시켜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룻밤을 대구에서 자고 갈까? 살짝 유혹을 느껴보았던 순간이었다.




조금 이른 점심을 대구백화점 근처에 있는 상주식당에서 했다.

정갈한 경상도식 추어탕. 기교를 부리지 않는 담백함은 장점이었지만 구수한 맛이 부족했다. 
같은 경상도식이라도 아내와 내겐 경북 청도에서 먹은 추어탕이 더 좋았다.
추어탕은 김치와 어우러져야 하는데 이곳의 김치는 깊은 맛이 나지 않아 겉돌았다. 


식사를 하고 근처의 2
·28기념 중앙공원을 산책했다.
1960년  2월28일 일요일임에도 야당인 민주당의 유세장에 나가지 못 하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어 자유당 독재에 대한 고등학생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4·19혁명의 전조와도 같은 사태였다.

공원 입구에 서 있는 시비의 한 구절.

   허옇게 뿌려진 책들이 짓밟히고
   그 깨끗한 지성을 간직한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
   빛 좋은 개살구로 익어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에
   아아 우리들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모습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기록된 대구의 치열함.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야도(野都)' 대구의 민심이 우리 민주주의 도정에 남긴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선거에서 선택은 어떤 것이든 존중 받아야 할 고유의 권한이지만
그 결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공원 가까운 곳에 소녀상이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불과 몇 달전인 2017년 3월1일에 세워진 것이다.

소년상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해방 후 반세기가 넘도록 
그 시절의 '소녀'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책임 있는 양쪽 한일정부 누구도 그녀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위로 한번 제대로 건네지 않았다.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25년, 1,200회를 지났지만 언제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 

  (···)
  영문도 보른 채
  일제순사에게 손목 잡혀
  멀∼리 만주나 남지나해로 끌려 간
  경상도 고일마을 15세 처녀 남이
  긴 댕기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리던 고향 우물가
  버드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데

  너는 그 어느 낯선 곳에 어린육신을 묻었는지
  여태 돌아오지 못 했구나
             - 대구 소녀상 옆에 새겨진 시, 「살구꽃 봉오리」 중에서 -

아내와 소리내어 시를 읽었다.
 



몇년 사이 커피가 생활 공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부쩍 커졌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상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신다는 말도 있다.
특별한 이유를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도 분명 예전보다 커피를 많이 마신다.
80년대 관계했던 어느 동아리에서 "커피 마시지 않기, 청바지 입지 않기 " 등을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할 수칙으로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세태의 변화가 흥미롭다.

대구에는 인구 수 대비 커피 전문점 수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대구의 커피 역사는 한국전쟁 때 들어온 미군부대의 영향도 있다고 하던가?
어쨌든 2·28기념 중앙공원 일대에는 대구 토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이 많다.
다빈치커피, 커피명가, 슬립리스인 시애틀 등등.
대구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지점을 확대한 전문점도 있다고 하니
세계적인 유명 커피숖의 공세를 이겨내는 그들의 경쟁력이 놀랍기까지 하다.
아내와 내가 동성로 일대를 돌다가 들어간 곳은 커피명가였다.  


내게 대구는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으로 인상 깊다.
(이하 "" 인용부는 별도 언급하지 않는 한 이 소설에서 인용했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더러운 세월"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간고한 '대구 생존 전쟁'이 아프게 혹은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는 소설이었다.

대구는 한국전쟁을 '최후의 방어지'로 견뎌냈다. 그 때문에 격렬한 사회문화적 변동이 뒤따랐다.
1951년 이후로 대구에는 당시 인구의 60%가 넘는 십륙만팔천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곳곳에 "게딱지 붙듯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즐비" 했을 것이다.

   "휴전이 되고 해가 바뀌었다지만 그 무렵까지 대구에는 2군사령부, 군통합병원, 미8군사령부 외에도
   육군 본부가 미처 환도하지 못한 채 있었고, 군에 의지한 각종 기업체와 군수 공장과 하청 공장이 많아
   전쟁 경기가 좋았다.  시내 중심거리인 중앙통 · 향촌동 · 송죽극장 일대에는 넥타이를 맨 양복장이와
   양장 차림에 뒷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은 젊은 여자들로 넘쳤고, 군복 차림의 한국군과 미군도 민간인
   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편 피난민 · 실업자 · 지게꾼 · 거지 · 구두닦이 또한 발에 채이는
   멩이만큼이나 널려 있었다. 그 시절 문자로 말하자면 '빽'이 있는 부유층은 흥청망청 돈을 썼으며,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서민은 하루 끼니를 잇기에도 부대끼었다. 전쟁이 나고 시장 규모가 몇십 배로
   커져 속칭 양키시장으로 불리우게 된 교동시장에는 별난 외제 물건이 다 나돌았지만 칠성시장과 같은
   서민 상대의 장판은 먹고 살기 위한 아귀다툼으로 팔도 사투리가 난무했다. 전쟁 후유증에 따른 인심
   사나운 그런 세상일수록 양극화 현상은 두드러져, 종로 거리 일대와 덕산동 뒷골목에 자리잡은 요리집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어 노랫가락과 장고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여행이었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 길남이와 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마당 깊은 집" 일대를 걸어보자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본격적으로 "마당 깊은 집" 부근을 걸었다.
자연스레 근래에 "대구 근대화 골목"이라 이름 붙여진 코스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 진골목.
실제로는 약 100m 정도 길이의 진골목은 '긴' 골목을 뜻한다고 한다. 
1907년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라는 안내 비석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을 열었다는 미도다방과 오래된 소아과 그리고 소설에도 나오는 음식점에
대구 출신 유명인들의 저택이 있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냥 골목길이었다.
그래도 꼬불꼬불 골목길은 정겹다. 
 


길에 세우진 이정표를 보고 대충 방향을 짐작을 걷는데 어디선가 한약냄새가 풍겨왔다.

아내와 나는 약전골목(약령시문화거리?) 근처를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내가 "여기 살면 저절로 몸보신이 되겠다."고 말했다.

   "약전골목은 이름이 골목이지 차가 다니는 훤한 한길이었다. 길 양쪽으로는 단층 기와집에 유리문짝을
   내단 약제 도매상과 한약방들이 즐비했고 그 안과 처마 아래에는 갖가지 약초가 건초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거리로 나서면 감초 따위를 작두로 잘게 써는 구경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향긋한 약초 내음이 
   기분좋게 코에 스며들었다."


『마당 깊은 집』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강인하고 모질었던 길남이의 어머니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엄청난 전쟁의 뒷자리에서 남은 생명을 키우고 부지해야 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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