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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끝)

by 장돌뱅이. 2017. 9. 5.

25. 조선족에 대하여

북경의 마지막 밤,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한국대 중국의 축구경기가 있었다.
북경에서 경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운동장으로 갔겠지만 이 날의 시합은 상해에서 열렸다.

우리는 맥주를 준비해놓고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침대가 들썩이도록 응원을 했다. 
결과는 우리 팀의 통쾌한 승리였다.

오래 전 중국 현지 공장의 조선족에게 한국과 중국의 운동경기가 있으면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는
우문을 던진 적이 있다. 평소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그 때 그는 '당연히 중국팀'이라고 대답했다.
왜?라고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그런 질문은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중국사람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한국말, 아니 조선말을 하는 중국인인 것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적인 환경에서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몇 십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 시기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민족의
후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뿌리의 확인이 현실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그들과 우리가 아직도
하나라는 등식으로는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문화적.역사적 바탕 위에 서있는, 그야말로 '조선족'이고 오늘날 그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의 전통 생활 문화가 중국의 그것과 부딪히면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독특한 우리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들을 보통의 중국인과 동일한 위치에 두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급속한 침투로 동북3성의 조선족 자치사회는 철저히 파괴되어 이제는 우리 사회와
동일하게 변해 버렸다고 하지만......



*위 사진 : 중국 출장 다니던 어느 날 조선족식당에서.


최근에 읽어본 어떤 글은 우리의 옛 고구려의 강성은 변방 종족들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다양성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중국과 옛 소련에서 독자적이고 탄력성이 있는 문화권을 형성한 조선족과 고려족의 독특하고 이질적인 경험에
대해 경제력부터 먼저 밝히는 남한 사회는 여태까지 너무 무관심했다.
재중.재소 동포들은......민족적 정체성을 어렵게 보존하면서도 남한 사회와 달리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요소를
별로 가지지 않는다. 미국의 삼류문화보다는 (조선족과) 고려족의 이런 문화적 포용성이 한국의 진정한 세계화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그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또한) 남한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네팔인들의 순수한 불심과 인내심이나 몽골인들의 인간 존엄성의 존중, 파키스탄인들의 상술이나 필리핀인들의 열정
등은 단색적인 한국 사회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이 가난하다는 얇은 생각 이전에 독특하고 깊은 그들의 문화를
먼저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돼야 동북과 한반도의 여러 종족과 다양한 정치.문화.혈통적 관계를 가졌던
고구려가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중국을 비교적 자주적인 자세에서 대한 것처럼, 한국도 반세기의 숙제인
대미 종속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다."


26. 북경을 떠나며

이제 나는 북경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북경은 불과 4박5일의 여정으로 돌아보고 뭔가를 쓰기에는 나의 역량에 비해 거대한 곳이었다.
불가피하게 남의 글을 많이 끌어다 부족한 부분을 메꾸게 되었다.

언급하지 않은 이야기가 꽤있다. 라마교의 사원이 되어버린 옹화궁의 자욱한 향불 연기와
거대한 나무불상 그리고 딸아이의 기념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던 젊은 스님,
한때 북경의 하늘을 울렸던 거대한 북과 종이 있는 고루와 종루,
그 주변의 옛 북경의 모습인 후통(胡同),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던 왕푸징 거리의 활기와
백화점에서도 심지어 호텔에서도 무조건 깍아야 한다는 북경에서의 힘든(?) 쇼핑,
늦은 밤 불빛도 없는 낯선 곳으로 차를 몰고가 우리를 놀라게 했던 택시 운전사 이야기 등등.....

이쯤에서 끝내자. 일기처럼 여행기도 있었던 모든 일을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며칠 동안 숨쉬는 '사람'보다 죽은 '황제'만 찾아다니다가 왔다는 느낌이다.
거대하면서도 세밀한 황제의 자취는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황홀함은 기대 이상이었다.
감동과 탄성이 아픈 다리와 피곤함도 잊게 만든 4일이기도 했다.

새로 지은 청사로 이사를 앞둔 북경의 낡은 공항은 무척이나 혼잡했다.
우리는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인파에 떠밀려 들어가야했다.

"우리가 일행이라서 그러는데 좀 먼저 가도 되갔습네까?"
앞에 서있던 중년의 사내가 우리 뒤쪽의 사내를 끌어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시지요."
"고맙습네다."
무심히 말을 주고받던 나는 그네들의 가슴에 붙어있는 작은 뺏지를 보았다.
아! 그들은 북한 사람이었다.
스피커에선 평양행 항공기에 빨리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더 말을 부쳐볼 틈도 없이 그들은 서둘러 출국심사대를 빠져 나갔다.
왠지 허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만남이라기 보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우연한 스침인 터에.  

식당 종업원을 빼곤 처음으로 말을 주고받은(?) 북한사람이었다.
그는 무슨 일로 이곳을 다녀가는 걸까? 어디서 태어났을까?
자식들은 몇 명이나 될까? 부인은 어떤 사람일까?
비행기 안에서도 그에 대한 상상을 해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서울이었다.
잠깐 사이에 다시 '일상의 질서' 속으로 귀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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