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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12

by 장돌뱅이. 2017. 9. 5.

22. 벽운(碧雲寺)

벽운사(보윈쓰)는 1925년 죽은 손문(孫文)의 유해가 남경(南京)으로 옮겨지기까지 2년간 머문 곳이다.
지금도 전당의 중앙 홀에는 손문 상반신 상과 소련에서 보내온 수정관이 전시되어 있다.
이 관은 손문의 유해가 입관이 끝난 후에 도착하여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킨 손문은 대만에서도 중국에서도 모두 존경받는 인물이다.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이 살던 집은 자금성 옆에 있으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중국 근대사의 격변기를 살아간 송씨 집안의 세 자매의 삶은 자못 드라마틱하다.

첫째 애령은 중국 중앙 은행 총재와 결혼하였고,
둘째 경령은 중국의 국부 손문의 아내가 되었으며,
셋째 미령은 장개석의 후처가 되었다.
흔히들 애령은 부을 사랑하였고, 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으며, 경령은 중국을 사랑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양자경, 장만옥, 오군매등이 주연한 영화 《'송가황조》는 송씨 자매의 그런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벽운사는 북경에서 약 20KM 떨어진 香山公園(샹산꽁위엔) 옆에 위치해 있다.
원나라때 세워진 600년 이상된 고찰이면서도 원래의 모습이 완벽하게 보존된 곳이라고 한다.
사찰내의 각 건물은 산세를 따라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내는 북경엔 온통 계단뿐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내렸다.

벽운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금강보좌탑(金剛寶座塔)이다.
높이가 35미터나 되는, 탑이라기 보단 하나의 건물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큰 탑이었다.
탑의 각 면은 천왕(天王), 역사(力士), 용봉(龍鳳)등 부조와 수많은 불상이
정교하고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어 화려하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표현양식과 사용부재가 틀린 다른 나라의 불탑은 우리와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기억되기가 쉬운 법이다.
그러나 이곳의 금강보좌탑은 우리나라의 화강암과는 다른 대리석을 소재로 사용하였고 표현양식도
우리의 전통적인 3층 석탑과는 다른 다층의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전체적인 외곽의 선의 모습보다는 세부적인 부조물의 조각이 아름다웠다.
제법 힘들여야 올라설 수 있는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무척 좋았다.


23. 오탑사 (五塔寺 )

오탑사(우타쓰)는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방문지이다.
벽운사를 나와 택시를 타고 부지런히 달렸음에도 우리가 오탑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4시반이 넘어서고 있었다.
오탑사의 방문객 입장 마감 시간이 막 지난 때였다. 기사아저씨가 오탑사의 위치를 잘 몰라 절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한 것도 늦어진 한 원인이 되었다.

오탑사의 진짜 이름은 진각사(眞覺寺)이다. 1473년 명나라 승조 황제는 진각사를 짓고 금강옥좌탑을 세웠다.
청나라 말기에 절은 파괴되고 지금은 탑만 남아있는데 현재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우리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본 사진에는 벽운사의 탑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색깔은 갈색으로 되어 있었다.

오탑사 앞에서 나는 식구들을 뒤에 세워두고 절의 입구에 있는 관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입장시간은 막 끝났지만 아직 절 안에는 몇몇 관람객들이 서성이고 있었기에 얘기하면 어째 잠깐이라도
탑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서였다. 그러나 공안처럼 제복을 입은 젊은 관리원은 완강하였다.
내가 비굴할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서툰 중국어로 한국에서 여기까지 가족과 함께 왔으니 잠깐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했으나 그는 시계만 가리키며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입구에 서서 안쪽 탑의 사진을 찍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찰 내에 관람객이 남아있고 마감시간을 막 넘긴 시간이었으니 그 관리인의 재량에 따라
입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아쉬움이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나오며 씁쓰레한 기분으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공무원이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에서 사람들은, 특히 공무원은 업무종료 시간에 철저하다.
90년대초 중국을 여행하면서 나는 몇 번인가 이와 비슷한 경험은 한 적이 있다. 한번은 항공사 사무실에서
티켓팅을 위해 줄을 섰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여직원이 아무런 말도 없이 나무로 된 칸막이 문을 확 닫았다.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여직원은 칸막이 위로 고개를 내밀며 손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무뚝뚝한 군대식 음성으로 점심시간 아니냐고 화를 내었다. 나는 2시간의 점심시간 후에 다시 그 곳으로
가서 한시간쯤 기다린 후에야 원하는 비행기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위 사진 : 중국 출장이 한창이던 시절 산해관 출장길에 노룡두에서.

또 한번은 천진(天津)에서 기차를 타고 세시간인가 들어간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구안)의 한 호텔에서 경험했다. 
배가 고팠으므로 짐을 풀자마자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으나 종업원은 내게 '복무시간'이 끝났다고 말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 때 시간이 저녁 8시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곳은 만리장성이 바다와 만나는, 노룡두(老龍頭)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곳임에도 길거리의 모든 상점 역시 장사를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국가 소유인 탓이었다.
고픈 배를 쓸며 다행이 다시 숙소롤 돌아왔을 때  한 여종업원이 그런 내가 안 쓰러웠던지
밀가루 부침 같기도 하고 떡 같기도 한 것을 두 개 전해 주었다.
돈을 주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았다.


24. 식당 카오로오완 (烤肉宛)

식당 이름대로 "고기를 구워 먹는" 식당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양념 불고기 비슷한 것을 주방에서 조리하여 접시에 담아 나왔다.
명함에 나와있는 것처럼 청나라 강희25년(1686년)에 문을 열어 300여년이 되었다는데,
지금의 모습은 깔끔한 현대식이었다.  소고기 구이와 양고기 구이를 시켰으나 우리 입맛을 사로 잡지 못했다. 
크게 실망하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다른 메뉴를 시키려니 해독이 불가능하여 식당 내부를 종업원과 함께 한바퀴 돌며
사람들이 먹는 것 중에 맛이 있어 보이는 요리를 주문하였다.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중국음식을 잘 몰라 실물을 보고 고르는 중이라고
떠듬떠듬 설명하자 사람들은 적극 협조와 추천을 하여 주었다. 이 날 최고의 음식은 아내가 고른 것으로
생선을 통째로 칼로 져며 튀긴 후 소스를 덮은 보기에도 화려한 음식이었다.
우리는 칭따오 '피지우'와 함께 북경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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