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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10

by 장돌뱅이. 2017. 9. 3.

18. 명십삼릉과 '의리'의 조선

단체 여행을 하건 개인 여행을 하건 북경을 찾는 여행객은 만리장성과 明十三陵(밍스산링)을 함께 묶어 돌아보게 된다.
두 곳 다 북경에서 북서쪽으로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명십삼릉은 명나라 13명의 황제와 황후 등이 묻혀 있는 곳이다.
능으로 가는 길과 능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데 옛날부터 경작과 나무 베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의 능은 황실의 어떤 기준에 의하여 모두 동일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황제가 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들었는가 죽은 후에 만들었는가에 따라 그 규모와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당연히 황제 생전에 미리 만든 것이 더 크고 화려하다.
현재는 3개의 능만을 개방하고 있는데 여행객들은 흔히 지하궁전인 정릉(定陵)을 찾게된다.
정릉(定陵)은 13대 신종과 그의 두명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능으로 신종의 재위중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크다.
13릉 중 세 번째로 크다고 한다.

신종은 10세에 즉위하여 48년간 황위에 있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여색을 밝히며 25년간이나 조회를 한번도 열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신종은 21세 때부터 6년에 걸쳐서 자신의 능을 조성하였다.
이 공사에 은 800만냥이 소모되었고 하루 평균 3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100만명이 6년 반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지하궁전은 말 그대로 흰 대리석으로 만든 지하의 거대한 궁전이다.
죽은 뒤에도 황제로 군림하고 싶은 욕심이 만들어 낸, 광기어린 유적이다.
결국 이러한 '광기'는 나중에 자신의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고 말았지만...... 이제 침침한 조명 아래 말없이
누워 있는 황제의 영혼에게 이 곳은 그가 원했던 천만년 권세의 영화로운 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방문객들이 던지는 조소를 받는 역사의 법정으로 보였다.

신종은 만력 황제라고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여 준 황제이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는 만력 황제를 '재조(再造 : 나라를 다시 세워 주었다는 뜻)의 은혜를 준 은인'으로
기려 만동묘를 만들어 받들었다. 청나라가 들어선 뒤까지도 조선은 은밀히 만력 황제를 받드는 '의리'를 발휘하였다.
이 만동묘는 송시열의 화양서원과 함께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계곡 내에 있었다.
지금은 깨진 비석 하나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화양서원은 송시열과 노론 유생들이 세운 서원으로 노론의 권력이 막강해 지면서 점차 횡포의 온상이 되었다고 한다.
화양서원에서는 각 고을에 제수비용을 내라고 통보하고 거기에 응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통문을 돌려 축출하자는
공론을 일으켰으며, 봄가을 향사 때 유생들을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양민들의 재산을 거둬들이면서 잘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서원으로 잡아들여 사형(私刑)을 가했다. 집권하기 전 흥선대원군조차도 말을 탄 채 화양서원 앞을 들어서다
유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할 정도의 위세였다고 한다.

화양서원 못지 않게 기세등등했던 것이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만동묘(萬東廟)이다.
송시열이 죽으면서 남긴 말에 따라 권상하 등이 1704년 화양서원 안에 건립하였다.
'만절필동'(萬折必東 :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후 쓴 글로 중국의 강물이 도중에 만 번을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의리사상을 나타낸다)에서 처음과 끝자를 따서 만동묘라 했다.

영조2년(1726)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 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했다. 해마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일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곳이 유생들의 집합소가 되면서
화양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극심해졌다.

고종2년(1865), 나라에서는 서울의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므로 따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폐했다. 이후 흥선 대원군이 실권한 후에 재건 되었으나 순종1년(1907)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철폐하고 그 재산을 국가와 지방관청에 귀속시켜버렸다.
일제 강점기에도 비밀리에 제향은 계속되었으나 1940년부터는 아주 끊겼으며 1942년에는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다.

망해 버린 남의 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주는 '만절필동의 의리'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드라마'이거니와
우리나라의 국권도 망해 버린 일제 강점기까지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된다.
남의 나라 황제의 티끌만한(?) '야만과 광기'만 비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의 지나간 역사에는 더러 이렇게 더 큰 '부스럼'이 부끄럽게 박혀 있는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이 땅의 지배권력이며 지배층들의 속성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일주일 뒤로 다가온 총선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한판 흥겨운 축제가 되어야 할 자리가 온갖 거짓 논리와 불청객들의
'당신들만의 잔치'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선거 때가 되면 한번도 민중들의 뜻으로 지난 역사의
쓰레기들을 정리해 보지 못한 우리 역사가 서글퍼지기도 한다.
해방후 친일파 문제가 그랬고 독재정권의 뒷정리가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 지키는 의무에서도, 세금을 내는 의무에서도 벗어나 '무임승차'를 하면서도
아직도 동네 어귀마다 근엄한 표정의 포스터로 붙어 있는지 모른다.
여행기를 쓰다가 너무 글이 빗나갔다. 적고보니 답답한 느낌이다.


19. 만두집 두이추(都一處) 

이 식당은 치아먼따지에(前門大街, )의 앞서 말한 북경오리구이집 근처에 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식당이라고 한다.
'샤오마이'라는 만두피 끝부분을 꽃처럼 화사하게 마무리한 만두를 전문으로 하지만 다른 중국음식도 내놓는다.
주문하면 오리구이도 가능하다고 했다. 외국인들은 보통 2층이나 3층으로 간다고 해서 우리도 2층으로 올라갔는데
외국인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종업원 아가씨는 매우 친절 했다. 그녀는 우리의 서툰 중국어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며 우리의 주문을 받았다.
수줍은 듯 미소띤 얼굴이 우리를 편하게 하였다.
우리는 만두 외에 야채와 '꾸어빠'(鍋巴)라는 '누룽지 탕수육'도 먹었다. 
깔끔한 분위기와 종업원의 친절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가격은 무척 저렴하여 맥주 한병을 포함하여 83유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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