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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7

by 장돌뱅이. 2017. 9. 1.

12. 천안문 (天安門)
천안문(티엔안먼)은 우리가 9시 뉴스 시간에 북경 특파원이 소식을 전하는 뒷 배경 자주 나와
가보지 않아도 이미 낯익은 곳이다. 한가운데에 거대한 마오저뚱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왼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오른 쪽에는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고 붉은 바탕에 흰 글씨가 씌여 있는 곳이다.

천안문은 명나라 영락(英樂)15년(1417)에 건설되었는데, 지어질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 이라고 불렀다한다.
이후 전화로 소실되었다가 1651년 청나라 때 재건되었으며 이때부터 천안문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때 천안문은 황제가 조령을 발표하던 곳이며, 1911년 12월 25일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조서를
발표한 곳이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자리이기도하다.

천안문에는 5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가운데 문은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는 진시 급제자와 혼인을 위해 처음으로 자금성에 들어오는 황후만이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안문 앞에는 금수하(金水河)라는 작은 도랑이 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5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금수교 양쪽에는 화표(華表)라고 불리는 2개의 큰 기둥이 서 있고 기둥 위에는 후(吼)라는 전설 속의 동물 조각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황제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서 돌아와 국정을 처리하도록 권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망군귀(望君歸)라고도 부른다. 천안문 뒤쪽에는 망군출(望君出)이라 부르는 후가 있는데 망군귀와 정반대로
황제가 궁안에만 머물며 국정을 돌보지 않을 때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도록 권하는 역할을 했다한다.

예전엔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는데 외국인은 내국인(10유안)과 달리 30유안의 입장료를 냈는데,
이제는 15유안의 동일한 입장료를 내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천안문 위로 올라가는 데에는 경비가 삼엄했다.
가방은 가지고 갈 수 없었다. 보관소에 돈을 주고 맡겨야 한다.
나는 예전에 올라가본 적이 있고 유난스레 검문 검색이 심한 것이 무슨 호들갑처럼 느껴져 이번에는
내가 짐을 들고 남아 있기로 하고 아내와 딸아이만 올려 보냈다.

아내와 딸아이가 천안문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자금성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색의 거대한 성벽이 위압적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잡초가 돋아난 지붕에는 황금빛 기와가 옛날의 영화(榮華)를 과시하듯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중국엔 어디나 사람들이 참 많다.
천안문에서 자금성으로 이르는 길엔 온통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불과 백여년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공품을 싣고 일년에도 너덧 차례씩 이 곳을 찾아 왔을 것이다.
천안문에서 800여 미터나 떨어져있는 정양문을 통하여 몸을 움츠리고 가슴을 조이며 들어와 이 곳을
지날 때 쯤이면 이 엄청난 궁궐의 위용에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우리 나라 사신이 중국에 가는 것을 조천(朝天)이라 하였고 그 왕래 기록을 조천기(朝天記)라 하였다. 
천자를 뵈옵는다는 뜻이었다.

당시 북경에 사신이 갈 적에는 정사, 부사, 서장관등 세사람의 사신과 그 아래 200명 내지 300명의 수행원이
육로로 약2개월에 걸려 북경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위축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것은 그 시절 군사. 경제적으로 열세인 나라가 자기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방책의 하나로 생각하면 된다.
명분은 내주고 내정을 지나치게 간섭받지 않는 실리를 얻으면 되니까.
또한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우리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들여 올 수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서양의 문명과
과학기술을 익혀와 실학의 기초를 세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들 황제의 제사까지
염려하여(?) 대신 지내주는 등의 얼이 빠진 '의리'는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터무니 없는 세도를 부리며 힘 없는 사람들을 괴롭혔던 유생들의 작태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13. 황금빛 기와의 바다, 자금성(紫禁城)
천안문의 뒤쪽(북쪽)은 자금성(쯔진청)이다. 아니 자금성 남쪽에 있는 문이 천안문이다.
북경 여행의 중심은 아무래도 자금성에 있기 때문이다.
자금성은 현재에는 고궁(古宮 구꿍)으로 불린다.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중국 최대의 고건축군이자 성 자체가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다.
그래서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 구꿍보우위안)이라고도 한다.

이 곳은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주인공 부의(푸이)가 황제 시절에 살던 곳이며 명, 청 시기의 황궁이다.
남북 길이가 9백61미터, 동서 길이가 7백53미터, 궁실이 9,000 여칸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높이 10미터 두께 6미터의 붉은 색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바깥쪽 성벽을 따라서는 너비52미터의 해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땅 밑을 뚫고 들어오는 외부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땅 속에는 벽돌을 40여장의 두께로 깔았다.
이 때문에 자금성 안에서는 북쪽 문 근처에 갈 때까지 나무와 꽃을 볼 수 없다.

자금성의 구조나 특성에 대하여 나로서는 요약하여 설명할 능력이 없다.
해서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이란 책자에서 옮겨와 본다.

천안문을 지나면 좌우에 사직단(社稷壇)과 태묘(太廟)가 잇고 세 외문을 지나 태화문에 들어서면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이 나타난다. 하늘 이외에는 자연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완벽한 인공의 세계에 당도하게 된다.
완강한 축상의 공간군이 현란한 황색 기와와 붉은 기둥의 건축군을 형성하고 있다. 황제의 즉위식등 국가적
행사가 거행되는 태화전 앞의 광장은 조회와 대전을 거행하던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 태화전(太和殿) ,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세 전각은 황제의 낮의 공간이다.(외조(外朝) 혹은
정치구역이라 부른다). 낮의 공간은 모두가 권력의 공간이지만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령궁(坤寧宮)은 황제의 사적인 밤의 공간이다(내정(內政)이라고 부른다).
건청문을 지나면 천안문 이후 처음으로 나무와 꽃과 흙이 나타난다. 이 곳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천안문에서 오문(午門)을 지나 태화문 건청문에 닿는 완강한 남북의 축은 계속 이어져 북쪽 경산(景山)에
와서 완결된다. 자금성 전체가 하나의 건축군인 집합형식의 건축도시이다. 일련의 중요 건물은 모두 남북을
잇는 축에 배치되어 있고 ......중요한 문은 성벽의 중앙에 놓여 있다.

우리 가족이 자금성의 중심선 상에 있는 건물을 위주로 남에서 북으로 대충 걸어보는데만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 정도면 다리가 아프고 지칠만도 한데 나도 그렇고 아내와 딸아이도 전혀 지루하거나 힘든 줄 모르고 그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황금빛 기와가 파도처럼 겹겹이 출렁이는 이 곳 자금성의 황홀경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자금성 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태화문 앞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사자 한 쌍이다.
동쪽이 숫사자, 서쪽이 암사자이다. 수컷은 앞발에 여의주를, 암컷은 사자 새끼를 뒤집은 채 움켜쥐고 있는 형상이다.
암컷의 두 번째 발가락이 새끼의 입에 들어가 있는 것은 예로부터 중국인은 사자 앞발가락에서 젖이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가락으로 젖을 먹인다는 발상도 재미있고, 선이 선명하고 인상이 강렬하며 힘이 넘쳐 보이면서도

어딘가 친밀한 느낌이 드는 이 사자상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자상을 바치고 있는 받침대의
조각도 섬세하고 화려하여 매우 볼 만했다.
나는 이 사자상의 축소 모방품이라도 사 볼 욕심에 기념품 코너마다 기웃거려 보았는데 그 어디서도
오리지널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자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되었어도, 먼 옛날
온몸으로 사자상 제작에 몰두했을 장인의 솜씨까지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 모양이다.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많은 문화유산들이 '낡은 것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것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나마 자금성이 남아 있는 것은 그들 젊은 홍위병이 자금성을 볼 때도 우리처럼
마음 속에 어떤 감동이나 아니면 경외심 같은 것이 일었기 때문 아닐까?
'계급적'인 관점에서만 자금성을 말하자면 이른바 '천하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황제 한사람을 받든다'는 논리로
백성들의 고통 위에 쌓아 올린 잔인한 축조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럴 때 필요해 보인다.

지배층의 문화를 모두 반민중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가 민중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문화 유산을 모조리 폐기처분하는 일 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정서를 고양시키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아내는 자금성을 나오며 우리의 전통 문화를 중국의 그것과 비교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 나름대로는 우리의 것이 자랑스럽고 주변의 국가와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크게 보면 결국 중국 문화의 큰 카테고리 속에 파묻히는, 그래서 그들 문화의 주변부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자금성과 우리의 경복궁을 비교해 보더라도(그나마 우리의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것이다)
우리의 것이 왜소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고
'왜 세계에서 제일가는 유물만 골라서 우리와 비교하여 스스로 비참에 빠집니까? 그런 불공평한 비교가
어디 있으며 그렇게 비교해서 견딜 수 있는 나라와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래도 왠지 뭔가 우리가 중국에 대해 꿀리는 듯한
'찝찝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나 민족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고립된 문화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는 생명체처럼 생성, 성장, 소멸을 반복하며 주변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 얼마나 우리의 '독창성'이라는 양념을 더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금성과 경복궁은 규모와 기와 색깔의 차이뿐, 정말 다른 차이는 없는 것인가?
우리의 조상은 '대국'의 모형을 끌어와 우리의 궁궐을 세우면서, 그들 문화와는 다른 무엇을 집어넣었던 것일까?
그 때 우리의 짧은 안목으로는 그것을 집어 낼 수는 없었지만 대가의 눈에는 이미 그러한 것이 드러나 보였는 모양이다.
돌아와서 읽은 김석철의 앞선 책자에는 우리의 찝찝함을 달래줄 명쾌한 글이 있었는데 그의 글에 따르면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은 이미 경복궁의 건축에 우리의 경박함을 꾸짖듯 보다 근본적이고 심오한 철학을 심어 놓았던 것 같다.

서울과 경복궁이 많은 부분에서 뻬이징과 자금성을 원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뻬이징과 서울은 다른 도시이고
자금성과 경복궁도 여러 면에서 다르다. 건축형식에서는 같으나 건축미학에서는 독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
자금성에는 인간이 만든 기하학과 빈 하늘만이 있는 반면 경복궁에는 북한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형국이
궁성과 하나가 되어 있다. 자금성은 자연을 가지려 하고 경복궁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자금성은 스스로가
원점의 공간으로 주변의 자연에 상관하지 않는 독존의 질서를 가진 데 비해 경복궁은 주변의 토지형국과 자연의 흐름이
하나가 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자금성은 자연을 가지려 하고 경복궁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나의 가슴을 큰 북소리로 울린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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