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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4

by 장돌뱅이. 2017. 8. 30.

6. 천단공원 (天壇)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고궁,만리장성과 더불어 북경을 대표하는 천단(티엔딴)으로 향했다.
북경엔 구꿍(古宮,흔히 말하는 자금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천단과 지단,
동서로는 일단과 월단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각 단에는 각각의 신이 모셔져 있다.

천단에는 하늘의 신이 모셔져 있다.
천단은 명,청 양대의 황제들이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인간을 다스린다는,
그래서 자신의 권한이 신성한 것이라는 의식을 백성들에게 심어 봉건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황제가 제사를 위해 천단으로 이동할 때 백성들은 부복하여야 하며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면
그 대가는 바로 죽음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천단공원의 남문으로 들어가 기년전까지 둘러 본 후 서쪽 문으로 나오기로 했다.
천단공원은 남북으로 1.6KM, 동서로 1.7KM, 둘레 길이 6.5KM의 달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제단 건축군이다.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며 북쪽의 내외벽은 원형이고 남쪽은 사각형으로
각이 져있는데 이는 하늘이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시한다고 한다.

남으로 부터 북으로 정문 입구에서부터 원구단(圓丘壇), 황궁우(皇宮宇), 기년전(祈年殿)등의 건물과 고적이 늘어서 있다.
원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명실상부한 천단이다.
북경에서 황제가 살거나 드나들던 곳에 사용된 돌은 모두 흰 대리석이다.
때문에 화강암이 사용된 우리나라의 옛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이 부재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고 정교한 조각이 되어 있어 황제의 권위를 생각하게 했다.
원구단은 이 돌로 만든 3단으로 된 아름다운 석재 건축물이다.

황궁우는 상제와 황제의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원형의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건물이었다.
기년전은 천단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북경의 그림엽서에 많이 등장하는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직경이 30M이며 높이는 38미터의 원형 건물로서 3층으로 된 원형대리석 단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하늘을 뜻하는 푸른색이다.
이 곳에서는 매년 정월이면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천단에 대하여 쓴 글마다 작은 목소리로 얘기해도 크게 울리는 원음석, 세 번의 메아리가 들린다는 삼음석
그리고 벽을 통해서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회음벽에 관하여 써있었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거나 소음으로 인해 한가지도 시험해 볼 수 없었다.

북경의 (고궁을 포함한) 이 세계적인 건축물 군에 대하여 더 이상의 세부적인 평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일이다.
우리 가족은 단지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정문에서 원구단을 거쳐 황궁우, 기년전에 이르는 길
역시 아름답고 기억에 남을 만한 길이었다'라고만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서쪽 문으로 나오는 길가에 있는 재궁(齋宮)이었다.
이 곳은 원래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 재계하던 곳이라고 한다.
황제는 예규에 따라 제사 지내기 3일 전에 이곳에 와서 고기와 술을 금하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죄인을 재판하지 않는 등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궁중의 호화스럽고 안락한 생활이 몸에 밴  황제에게 그 기간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결국 청나라 옹정 황제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궁내에 재궁을 짓고 궁내에서 재계를 한 다음
천단의 재궁엔 의식을 행하기 서너 시간 전에 와서 재계하는 시늉만 냈다고 한다.
재궁이 사실상 황제가 제사 지내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휴식 장소로 변하게 된 것이다.
황제는 자기 스스로도 정말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권좌를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어느 때건 겪어야 하는 치열한 궁중 암투의 현실을 돌아보며
'왕권신수설'이란 이데올로기는 허위란 걸 스스로는 알고 있었을까?. 재궁의 용도가 변한 내역을 보면
적어도 그(들)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단지 요식 행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듯도 하다.


7. 천안문광장 (天安門廣場)
천안문광장(티엔안먼꽝창)은 1959년 중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건설되었다.
북쪽으로는 천안문, 남쪽으로는 모주석기념당과 정양문(전문), 동쪽에는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다.
광장의 남북 길이는 880M, 동서로는 500M에 이른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인민혁명기념비는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명·무명의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이다.
1958년 5월1일 노동절에 세운 이 비는 높이 38미터로 비의 정면에는 '인민의 영웅은 영원 불멸이다' 라는
모택동의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주은래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저녁 무렵 많은 사람들이 국기 게양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국기 하강식을 보기 위해서란다. 나와 아내는 이런 행사에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가 젊은 날 경험했던 유신 시절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강요되던 '충효'니
'애국'이니 '애족'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이겠는가.
그 시절, 권위적인 권력은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도 걸핏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과 불충'으로 몰아 세웠었다.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 나오며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경청을 해야 했던 애국가의 '지루함'을 떠올렸다.

1989년 6월, 이 곳에서는 학생들이 이끄는 민주화 요구시위로 발발된 '천안문 사태'가 있었다.
그 때 시위대를 향해 밀려 오던 군부의 탱크를 맨몸으로 가로 막던 한 사내가 보여 주었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용기에 세계는 주목했다.
무릇 역사는 KBS 연속극 '왕과비'식의 권력 다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름없는 무리들이 자유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힘든 삶의 과정을 이겨나간 슬기로운 지혜의 집적일 것이다.
60년 4월 광화문에서, 혹은 암울했던  '80년 오월 광주'에서,
마지막까지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며 산화해 간 우리의 젊은 넋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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