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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1

by 장돌뱅이. 2017. 8. 29.

여행기간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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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을 살아도 알 수 없는 땅, 중국
참으로 큰 나라이다. 국토의 면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고대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에서 중국을 빼고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시인 고은은 '그 곳에서 일생을 살아도 알 수 없는 땅'이라고 중국을 말했다.
일생을 살아도 알 수 없을 터인데 사나흘 머무르고 중국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위험은 중국보다 작은 나라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남자들은 군대 3년 동안의 이야기를 30년 동안 울궈 먹는다고 한다.
남들이 한 경험까지 빌려와서 자신의 이야기로 둔갑시키곤 하니까 보통 30년이 아니라 'NEVER ENDING STORY'가 되곤 한다.
이번 짧은 중국 여행의 기록에는 이 노하우(?)를 써먹어야겠다.
중국에 관하여 내가 가족 여행 중 또는 업무 출장 때 본 것 이외에
이것저것 읽고 들은 남의 이야기도 모아 보려한다.
앞서 말했지만 중국은 너무 큰 나라이니까.
우리 가족의 이야기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니까. 
그런다 하더라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끝날 공산이 크지만,

'장님' 손에 만져진 중국의 일면도 어쨌거나 중국임에 틀림없을 테니까.


중국의 공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PRC)이라고 한다.

중국 국토의 면적은 960만 평방킬로미터로 옛소련,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땅이 넓다.
이 넓이는 유럽 전체면적과 같으며 우리나라 남한면적의 96배 크기이다.

옛날 중국 사천 지방의 나무꾼은 이름대로 나무를 해서 살아가는데 우리처럼 시장에 지고 가서 파는 게 아니라
아예 뗏목으로 만들어서 양쯔강을 타고 상하이까지 내려가면서 팔았다 한다. 무려 5천km의 대장정에 나서는 것이다.
한 반년쯤 나무를 해서 뗏목으로 만들며 뗏목 위에다 집을 짓고 채소까지 심는다.
닭도 몇 마리 실어 그 닭이 병아리를 까고, 병아리가 다시 병아리를 까는 동안 이동을 한다.
상하이에 도착하면 나무와 키운 가축을 팔고 가족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한번에 3년은 족히 걸린다.
서너번 왕복하면 애들이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는 것이다.
과장이 있겠지만 그 정도로 큰 나라라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8월 24일 국교가 정상화 되었다.
앞으로 세계는 어떠한 형태로건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할 걸로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인구 14억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중국 인구1인당 1년에 콜라 한병씩만 먹는다 해도 14억병이 필요한 나라이다.
천원씩만 잡아도 1조4천억......
나이키 신발을 한 켤레에 5만원씩만 잡으면? 내 사무용 계산기의 용량을 벗어나 에러가 나온다.

동네 통장 아저씨(이런 직책이 있는지 모르지만)만 모아도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들이 '코쟁이' 나라에도 기죽지 않는 이유는 이 무궁무진한 시장성을 무기로 들이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국민성'이라는 것이 고정불변의 것인양 말하는 것에 반대한다.
국민성이라는 것은 사회, 역사적인 산물로 언제나 변하는 것이지 본래부터
어떤 특정 인간이나 민족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중국인은 느리다고.
이른바 '만만라이'(漫漫來)나 '만만더'(漫漫的)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 농경시대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공산주의 논리가
적용되던 때의 일이지 개체호((個體戶 자영업자)가 허용된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중국에 가서 택시를 타보라. 그들은 더 이상 느리지 않다.
느리기는커녕 중앙선을 예사로 침범하여 앞차를 추월한다.

왜 그러냐고? 돈 벌어야하니까.

중국인을 또 '차뿌뚜어'(差不多 그게 그거다, 대충 똑같다.)한 민족이라고 한다.
호적(胡適)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 『差不多先生傳』의 주인공은 '差不多'한성격의 인물로,
장부를 계산하라고 하면 '10'과 '100'이 별 차이가 없다하고

"세상 만사란 '차뿌뚜어'면 돼. 뭘 그리 따지고 산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으면서도 "산거나 죽는 거나 별로 다른바 없다"고 말한다.

정말 중국인들이 그런가? 역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영악하고 냉정하게 문제를 판단할 줄 안다.
그들이 '만만더'하며 '차뿌뚜어'한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이해득실에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 물건이 있어도 쉽게 그 의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철저한 포커페이스로 팔 사람이 급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의 거래에서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가라앉는 우리의 급하고 '화끈한'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있다.

중국인은 뛰어난 상술을 가진 민족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맞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는 사람도 오늘 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통통 털어 명월이에게'
바치는 멍청한 '왕서방'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商人(상인)이라고 할 때의 商은 고대 중국의 '商나라'를 의미한다고 한다.
商나라는 기원전 1,111년 周나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나라를 잃은 상나라 사람은
고향을 떠나 유랑을 하며 상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상인으로서 무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설날에도 그들의 인사는 "꽁시파차이"(恭禧發財 : 돈 많이 버십시오)이다.
중국사람들에겐 당연히 돈의 신(錢神)이 있으며 그보다 한 수 높은 재신(財神)도 있다.
계산하는데 필요한 주산을 쏸판(算盤)이라고 하는데, 7백년이전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계산기가 발달한 지금도 주산은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어린아이의 돌잔치 상에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붓과 함께 주산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우리의 고려나 조선처럼 장기간 안정된 나라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거의 매년 전쟁과 정치적 급변의 역사를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몸에 걸치는 옷가지등의
외양적인 것보다는 음식이라든가 황금등의 실속있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중국에서 옷차림만으로 그 사람의 직위나 빈부상태를 가늠하는 것은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는 업무 미팅에 런닝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샌달을 신고 참석한
중국 회사의 부총경리(우리 식으로 부사장)를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좋은 느낌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인 것이다.

그들의 재물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동남아 각국에서 현지인들의 그들에 대한 감정은
종종 폭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물을 노린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전통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도 않는다.
현대에 들어 중국대륙이 공산혁명과 뒤이은 내부적인 문제로 잠시 그들의 전통 생활 방식을
접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은 중국의 장강과도 같은 역사에 비하면 짧은 한 순간일 뿐이다.
이제 그들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사의 전면에 나서고자 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이 수천년동안 쌓아온 전통의 힘으로 우리에게 그들의 방식을
과시하고 강요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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