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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중국 상하이 출장

by 장돌뱅이. 2016. 3. 29.

상해는 내가 제일 처음 가본  중국이다. 90년대 초반이었다.
앞선 출장 선배들의 무용담을(?) 통해서  당시에도 이미 중국은, 특히 경제특구벨트에 해당되는
해안도시들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이영희 선생님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이성』,『8억인과의 대화』등을
읽은 여운이 남아 있던 터라  "홍교국제공항(场)"에 비행기가 미끄러져 내릴 때는
미지의 사회에서 헤쳐나가야 할 업무의 중압감 한편으로  제법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도 느껴보았다.

그 당시에 중국여행을 위해서는 출발 전 외무부에서 "특정국가여행"이라는 허가 직인을
여권에 받아야 했고, 속성 비자를 받기 위해 멀리 홍콩을 경유하며 하루를 지내야 했던 만큼
중국이라는 '금단의 성'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의 구전(口傳) 업무 '매뉴얼'은(?) 단순했지만 강렬했다.
「우정이 깊으면 단숨에 마셔야 한다」는 게 중국의 주법이니 중국 거래의 핵심인
두터운 ‘꽌시(关系)’ 를 위해 술잔 앞에서 호기를 부리라는 것과
최소 3곡의 중국 대중가요는 외워두라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술로 맺은 관계가 지속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걸 따져볼 틈도 없이 매일 저녁이면 독한 고량주를 맥주잔으로 거푸 마시고
몽롱해진 정신을 다잡으며 등려군(鄧麗君)의 노래 "첨밀밀(蜜)"과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그리고 이익군(李翊君)의 평취(萍聚) 등을 부르곤 했다. 
가사의 내용은 대강 알 뿐이고
선배가 수첩에 적어준 발음만을 보며 씨디를 통해 기계적으로 외운 것이었다.

당시의 상해와 그 인근을 돌며 느낀 중국에 대한 첫 인상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혼재된 모습이었다.
(이영희 선생님의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덕목들은 파악해 볼 겨를도 없었지만
적어도 만나는 '궈이찌 마오이(국제 무역)' 종사자들 사이에선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했다.)

외국인들은 공식적으론 FEC(兌換券 Foreign Exchange Certificate)를 사용해야 했다.
FEC는 미국 달러와 1:1롤 교환하여 쓰는 외국인 전용 돈이다. 모양부터 중국돈 유안과는 틀리게 생겼다.
1달러가 1유안의 가치밖에 없으니 외국인에겐 매우 불리한 조건의 교환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암시장에서 8배 (정확한 기억이?)의  환율로 교환하여
비용 지출시 현지인들에게 대신 지불토록 하였다.
(이 제도는 중국에서 90년대 중반 폐기되었다.)

호텔과 상점과 음식점의 경우 적극적으로 손님을 유치하려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심드렁한 복무원(服务员)이 손님에게 매우 무관심하고 기계적인 서비스를 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항공사 사무실에서는 대기 손님의 긴 줄을 보면서도 두 시간의 점심 식사 후에 오라고
거칠게 문을 닫기까지 했다.

약삭 빠른 상술에 '갑질'까지 겸비한 거래처의 구매 부서가 있는가 하면, 팔거나 사는 역학 관계에
상관없이 시종 후덕한 미소로 극진한 대접을 해주는 국영기업의 상급 관리도 있었다. 

평생을 직장에서 해고될 염려없이 근무한다는 '철밥통(铁饭碗  띠에판완)'과
작업 성과에 상관없이 균일하게 분배하는 '한솥밥(大鍋飯 따꿔반)이 퇴색한 채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정신이자 제도로 남아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막 돌아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듯한 귀밑 머리 파랗고 단정한 차림새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젊은 동사장이 위엄을 부리는 곳도 있었다. 

언어의 소통은 (영어가 통하지 않는) 당시 중국 비즈니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다.
초창기의 선배들이 홍콩의 에이전트를 통해 중국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은 이른바 '꽌시'의
이유와 함께 이런 언어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상해 외곽의 한 호텔에서(금박으로 치장된 훌륭한 외모의 그러나 내부는 또다른 얼굴의) 
아침에 계란후라이 두 개와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주문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상급 매니져까지 출동했는데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호텔인데!
결국 쥬스는 커피로 바꾸로(다행이 중국어로 커피가 '카페이'인지라)
수첩에 닭과 달걀을 그려서 이해시키는 30분 동안의 진땀 어린 공을 드려야 했다.
나는 그 뒤로 한참동안 닭과 후라이판 위에 달걀이 그려진 그 수첩을 지니고 다녔다. 
나중에는 한국인 입맛에 맛는 음식 (중국어)목록을 누군가에게 전수 받아 지니고 다녔다.

30대 중반의 거칠 것 없던 그 시절의 내가 어느 덧 정년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나의 변화를 가져온 세월은 상해 역시 크게 변화시켰다고 들었다. 
상해는 이제 세계를 호령하는 중국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5일 동안 업무차 상해를 다녀왔다.
동방명주가 완공된 것이 1995년, 나의 상해행은 그 이전의 일이니 최소 20년만의 상해행이다.
첫 출장 이후 몇번의 상해행이 이어졌고 그 이후로도 중국 출장은 이어졌지만
주로 대련과 청도
그리고 샤먼과 광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상해 푸동에서 있었던 EXIBITION 방문과 미팅이 출장의 목적이었다.
푸동은 황포강 동쪽을 의미한다. 서울의 강남쯤이라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텅빈 벌판이었던 황무지엔 거대한 현대식 건물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1999년 강택민 주석은 푸동을 방문하여 "21세기에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경제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감 넘친 연설을 했다.
당시 서양의 한 언론은 "세계 총생산에 중국 지분은 3.5%밖에 안 되며, 1인당 국민 소득은 세계81위,
군사적으로도 2등급일 뿐이어서 이라크 같은 지역적 위협 요인에 불과하다"고 중국의 꿈과 계획에 평가절하와 냉소를 보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위상에 대해 재론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90년대 중반까지도 '한강의 기적'을 모범 사례로 한국을 연구하던 성 단위의 연구팀은 이제 해체되고
대신
'구미 자본주의 이식과 적용에 실패한 사례'로서 한국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20년만에 만난 상해는 내게 '천지개벽'의 모습이었다.



우중충하고 복잡번잡했던 황포강 동쪽의 옛 시가지도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골목 사이사이 옛 기억에 가까운 거리와 풍경이 '위태롭게' 남아 있었다.



중국 음식.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원하는 형태의 음식을 웬만큼 먹을 수 있었다.
알량한 학원 3개월 실력의 내 중국어가 유창해서가 아니라 최소한도의 소통이 가능한
직원이 서빙을 해주었고
사진이 실린 메뉴를 갖춘 식당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출장 마지막 날 오후 잠시 시간을 내어 몇 곳을 다녀 보았다.
현재 한국의 상황 때문에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상해임시정부유적지.

상상초월의 인파 때문에 입구에서 돌아나온 위위엔(豫園).

↑ 푸동의 중심부.

강을 사이에 두고 푸동을 마주 보는 옛 상하이 와이탄.

↑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중국인들.
20여 년 전의 첫 출장에서부터 아침 공원의 태극권과 함께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장면이다. 

↑ 푸동공항

↑ 푸동공항 아시아나(에어차이나)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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