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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중국 양저우 출장

by 장돌뱅이. 2015. 8. 3.

2박 3일의 중국 양저우(扬州) 출장.
가고 만나고 오고 - 여행이 아닌 출장은 매번 이렇게 짧고 단순한 일정이었으면 좋겠다.

양저우를 가기 위해선 먼저 난징(南京)으로 가야했다.
처음 경험하는 중국 동방항공으로 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거기서 차로 한 시간 남짓을 달리면 되었다.

내게 있어 중국 출장의 전성기는 20여 년 전이었다.
비자 이외에  '적성국가여행' 허가를 받아야 할 때 시작하였다.
그때는 직항편이 없거나 다양하지 않아 서해 바다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목적지를 가기 위해 멀리 홍콩으로 에두르기도 했다. 

중국 하면 "개방"이니 "경제특구" 등의 말들이 대화 속에 자주 거론되던 시기였다.
그 시절 중국은 이른바 "비동시적이고 비동질적인 것들이 동시에 혼재"하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가장 여러 번 갔던, 아직 동방명주가 없던 시절의 상해.
시내의 좁고 복잡한 도로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엉켜서 

몸을 움찔거리게 했고 경적음이 악머구리처럼 요란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빨간색의 크기도
작은 택시들이 상해에 많이 있었다. 
그  사이를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누비는 현대적 여성들의 늘씬한 다리가 
피곤한 출장자의 눈을 자주 번쩍 뜨게 만들기도 했다.

아침 시내 호텔에서 나올 때 '큰 일'을 반드시 보고 나오라고 앞선 경험자들이 충고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옆칸막이가(어떨 땐 앞뒤 칸막이도 ) 없는 재래식(?) 공공화장실에서
앞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보며 일을 치뤄야하는 당황스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별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늙은 지역 당간부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이 분들은 대체적으로 물건을
사러왔냐 팔러왔냐에 상관없이 방문자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와 흑묘백묘(黑猫白猫) 이론으로
무장한 듯한
젊은 사업가들의 자본주의적 눈빛이 일의 진행과 결과에 혼란스럽게 개입을 했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격려하는 현수막이 날리는 한편으론  
상해 한 호텔의 로비에 진을 치고 있는
매춘부들의 기사가 마치 중국에만 있는 치부처럼 뉴스위크지엔가 크게 실리기도 했다.

한 때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교통사고 사망율 1위의 자리를 이어받은 나라가 중국이라고 알고 있다.
그 시절 현장을 찾아 빌린 택시로 갈 때 택시의 광란에 가까운 질주가 기억에 생생하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어엿한 편도2차선 왕복 4차선의 도로인데 왜 꼭 중앙선을 넘어 앞차를 추월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날리는 먼지와 소음, 저녁 이내가 깔리던 먼 길을 따라
 '경제특구'의 도시와 그 주변을 오가며 내 젊은 날의 장돌뱅이 이력이 쌓여갔던 것 같다.

실로 오래간 만의 중국행.
그동안 중국의 변화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난징에서 양저우까지의 길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다. 새로 건설한 듯  깨끗하고 반듯했다.
중국 거래처가 보내주어 길거리 택시와 단순 비교는 안 되겠지만 내가 탄 승용차의 운전수는
곡예운전이 없이 편안한 주행을 해주었다.

숙소는 샹그릴라.
명성에 어울리게 만족스러운 곳이었지만 경험한 바 있는 방콕이나 쿠알라룸푸르,
혹은 자카르타나 수라바야의
샹그릴라 보다는 시설면에서 좀 떨어지는 곳이었다.
직원들의 친절은 같았지만 영어 구사 능력 역시 
다른 샹그릴라의 직원에 못 미쳐보였다. 
또 위치가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 쪽에 있어 현지의 일상 풍경을 가까이서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출장이 목적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는 훌륭한 곳이었다.  

중국이니 음식 이야길 빼놓을 수 없겠다. 양저우에는 볶음밥(양저우챠오판 扬州炒饭)이 유명하다.
볶음밥의 원조라지만 원조로서의 어떤 차별성은 모르겠고 우리나라 중국집의 볶음밥과 맛이
매우 비슷하였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았다. 
짜장 소스가 곁들여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곤.  

도착 첫날 중국 거래처 사장 D는 식사를 마치고 우리를 동관지에(东关街)로 데리고 갔다.
동관지에는 옛 모습의 거리에 들어선 현대식 상점, 한마디로 양저우의 '인사동'이다. 
그러나 인사동 보다는 옛 모습이 더 많이 남아있다고 해야겠다.
기념품과 술집, 음식점과 커피점, 찻집과 화랑, 옷가게 등등의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길 중간쯤에서 돌아섰다. 너무 더웠다. 
양저우의 날씨는 낮36도, 밤에도 28도였다.
구경도 좋지만 오래 걷기가 쉽지 않았다.
숙소의 에어컨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열대야였다.

이튿날 아침 중국인 사장 D는 전날 약속대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호텔의 아침 대신에 다른 특별한 곳에서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식당으로 이동 중에 본 양저우 시내 역시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차도와 이륜차 도로는 화단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어 예전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러시아워에는 버스 전용차로도 운영되고 있었다. 도로는 널찍하고 깨끗했다.
길가의 건물들도 최근에 지어진 것인양 현대적이었고 반듯했다.
20여 년 전에 비해 실로
중국의 놀라운 변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D는 양저우 태생으로 고향 양저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인구 100만일 뿐이지만 지도자 장쩌민도 배출한 곳이라고 했다. 
혹시 당신 공산당원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펄쩍 뛴다.
사업은 사업이고 정치는 정치인데 자신은 사업가라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예춘(冶春)이라는 이름의 큰 식당이었다.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들이 가득했다.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규모에 놀라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으니
간단히 하자고 했더니 이곳은 원래 아침 식사만 하는 곳이라고 한다.
양저우 전통 아침 음식만을 내놓는 식당으로 1877년에 문을 열어 현재는 정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전통 문화 보존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심춘(深春) 이라는 현판이 붙은 방으로 안내 되었다.
이 식당의 주제는 봄인 것 같았다. 매혹적인 봄(冶春) 속의 깊은 봄(深春).
제법 싯적 정취가 느껴졌다.

아담한 체구의 전통복장을 한  시아오지에(小姐) 한 명이 다소곳한 태도로 우리의 아침 시중을 들었다.
음식은 저녁 만찬 보다도 거대한 양이었다. 차를 포함한 기본 세팅된 밑반찬에 스프와 탕, 고기,
여러 종류의 찐만두(샤오롱포小笼包, 바오즈包子, 지아오즈 饺子), 찐 조류알(닭, 오리 메추리,
비들기?, & ?) 떡, 과일, 채소 등이 연이어 나왔다.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는 양이었다.

"지금도 보통 집에서 이런 정도의 양을 아침으로 먹는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물었다.
적어도 우리처럼 10시부터 미팅을 앞둔 사람들이 먹을 음식은 아닌 것 같았다.
"당연히 아니다. 간단히 먹는다. 하지만 이중에서 한두 가지 음식은 자주 식탁에 오른다.
이곳도 예전에 비해 양과 크기가 많이 준 것이다. 만두의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컸었다."
D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들 먹었다는 말이냐?"
"모르겠다. 아마 할 일 없는 벼슬아치들이 긴 시간 아침을 먹지 않았겠느냐......"

위 사진은 식사를 마치고  찍은 것이다. 모두 입이 벌어지도록 먹었는데 줄어든 느낌이 별로 나지 않는다.
덕분에 이 날 점심을 거르고도 오후 서너시까지 미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위 사진은 돌아오는 길에 찍은 난징 공항 모습이다. 아마 근래에 새로 지어진 듯 했다. 
출국심사대 직원들도 예전과는 다르게 상냥하고 빠르게 심사를 마쳐주었다. 
심사대 앞에 즉석에서 직원들의 서비스를 평가하는 버튼도 있었다.
기능과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적인 변모을 이런 곳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위 사진은 항공사 라운지에서 찍은 것이다. 신청사의 라운지답게  넓고 단정했다.
직원들도 친절했다. 다만 준비된 음식과 집기류들에서 아직 중국다운(?) 모습이 남아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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