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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 6

by 장돌뱅이. 2017. 8. 31.

10. 한 밤의 은밀한 유혹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무슨 전화지?' 잠결에 손을 뻗어 전화를 집어 올렸다.
동시에 이곳이 베이징이고 이 한 밤중에 내게 전화 올 데가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헬로우?"
"··· 맛싸지?"
뜻밖에 여자의 음성이었다.
"??? ··· 헬로우?"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물었다.
"··· 맛싸지? ··· 맛싸지?" 목소리는 더 느끼해졌다. 순간 알아챘다. 은밀한 유혹이었다.
객실마다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상대가 남자일 경우 추파를 던진다는······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낮은 목소리로 '맛싸지'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마 영어가 안 되기 때문일 것이고 그 말만으로 의미 전달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가족과 함께 머무는 방에 그것도 나름 규모와 수준이 있다는 이 호텔에서······

뒷날 아침 나는 프런트에 지난밤의 전화 건을 이야기하며  한국에서 오는 전화가 아니면 어떤 전화도 연결시키지 말 것을 부탁했다. 직원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확실히 조치를 취하겠다고 싹싹하게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도 나는 동일한 내용의 공포영화 속 목소리 같은 '안부전화'를 받아야 했다.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부인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대개 사실'이라는 말이 있다. 매춘 역시 그렇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과 더불어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옛 중국이 남겨 준 고질병인 성병을 하루속히 퇴치하자"고 훈시하고 1950년에는 전국의 모든 기생집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자하여 성병을 예방, 치료하여 60년대 초에는 중국 대륙에서 매춘과 성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선포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호텔방에 오후 10시 이후 같이 있으면 공안에게 잡혀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개방의 바람을 타고 매춘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근절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가난은 비웃어도 매춘은 비웃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라고 한다. 출장을 다니다 보면 쉽게 여자들의 접근을 받는다. 접근해 오는 방법 역시 다양하다. 이번 경우처럼 '맛싸지'를 받으라고 전화로 유혹을 한다거나  호텔 로비나 커피숍에서 직접 접근해 오는 경우 또는 호텔 앞에서 '삐끼'가  다가오는 경우 등등. 대개 그런 여자 뒤에는 공안이나 폭력배들 같은 조직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함정에 걸려들 경우 외국인 신분이란 약점을 이용하여 공갈 협박으로 금품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다고.

언제부터인가 중국에 투자하여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 중의 하나로 '아이런(愛人) 동지'가 거론된다. 현지 여성들과 필요 이상의 단계까지 가까워졌다가는 자칫 회사도 가족도 모두 잃게 된다는 경고이다. 꼭 매춘이 아니더라도 '삐끼'를 따라 혼자 술을 마시러 가는 것도 위험하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이다. 이에 항의를 하면 분위기가 험악한 '어깨'들이 등장한다. 호텔 방문을 두드려 전화 좀 쓰자며 무작정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술집에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유혹하여 공안이 들이닥치는 수법도 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나 같은 장돌뱅이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들이다.

매춘으로 중국 공안당국에 적발되면 외국인 남자의 경우 여권에 '호색한'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히고 추방당한다는 소문도 있다. 내가 그런 여권 들고 해외 다니려면 창피하겠다고 하자 어떤 '의지의 한국인'은 걱정 없다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귀국하자마자 여권 분실신고 내고 재발급받으면 되지!" 

요즈음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안전 문제가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한국인들의 납치 사건마다 조선족이 연관되어 있다고 주의를 촉구하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 같은 핏줄이면서 같은 국민이었던, 조선족과 한국인이 어쩌다가 이렇게  경계를 해야 할 사이가 된 것인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중국은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여행객들에게 별 방법이 없다. 그저 어디서나 고국에 있는 처자식에게 법적·도덕적으로 충성을 다하고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수밖에.

11.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하여
1929년 6월 미국인 에드가 스노우는 대기근이 휩쓴 중국 서북지방을 방문하여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그는 그때 그곳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최고 600만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린이들은 더 비참했다. 그들의 조그만 등뼈는 기형으로 굽어있고 그들의 양팔은 나뭇가지 같았으며,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채워진 그들의 자주색 배는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구석에 쓰러져 있는 여자들은 궁둥이가 바짝 말라 뼈만 날카롭게 뛰쳐나왔고, 가슴은 쭈그러진 자루와 같았다.
(··· ) 거리에서 막 목숨이 끊어진 시체를 보았으며 촌락의 얕은 웅덩이에 기근과 질병의 희생자들이 죽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충격적인 것은 이런 마을들 대부분에서 아직도 부자와 미곡 매점 상인과 소맥 매점 상인,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이 무장병력의 호위 하에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도시에는 (국민당)관리들이 기녀들과 어우러져 노래하고 희롱하는 가운데 식량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중에서 -

에드가 스노우는 마오쩌뚱을 비롯한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과 일반 홍군 병사들, 그리고 주민들을 폭넓게 인터뷰하고 1937년에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들 공산세력이 "종국에는 (장개석의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과감한 예언은 그로부터 12년 뒤 중국 혁명에 의해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가 그렇게 예언한 이유는 장개석의 국민당의 부정부패와 중국 공산당이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동일한 분석이 놀랍게도 당시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에도 나온다.

공산군은 10년 간의 내전과 7년 간의 일본군 공격을 견디어 냈다. 그들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의 몇 배의 일본군 공격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장 자신에 의한 봉쇄작전도 이겨냈다. 그들은 고난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성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생명력과 힘의 원천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지지와 민중의 참여이다. 공산당과 공산군은 근래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누리는 정부고 군대이다. 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 정부와 군대가 진정으로 민중의 정부이고 민중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이영희 편역,  미국 정부 발행 『중국 백서』 중-

70년대 하반기에서 80년 초에 대학을 다닌 사람 중에는 리영희 교수의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와『우성과 이성』, 혹은 『8억인과의 대화』를 읽으며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영희 교수는 그 책을 통해 굶주림, 숙청, 인민재판, 학살, 통제, 밀고, 붉은 깃발, 인해전술 따위의 섬뜩한 낱말만 떠오르는 '중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선입관을 교정해 주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평범한 사실과 함께.

혁명은 무엇이고 마오쩌둥은 누구이며 중국은 정말 어떤 나라로 변해 있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마오가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군대의 막강한 물량의 우세에 맞서, 혁명에 대한 꺾이지 않는 신념과 민중으로부터 받는 굳건한 지지를 바탕으로 끝내 20세기 기적 중의 하나인 대장정과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낸 중심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끈 홍군은 1934년 10월 14일부터 1935년 12월 22일까지 만리장성 길이의 2배에 해당하는 2만 5천 리의 대장정을 이겨냈다. 홍군은 지방 군벌군의 포위망을 뚫고 거의 매일 한 번씩의 전투를 겪으며 열여덟 개의 산맥을 넘고, 스물네 개의 강을 건넜다. 특히 그 열여덟 개의 산맥 중에서 다섯 개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맥이었다. 그 빈약한 수송수단으로 그처럼 대규모의 군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험난한 지형을 그런 (일일 평균 38.5KM) 속도로 행군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오(毛)만큼 비방과 찬양의 극과 극, 그리고 그 사이의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도 드물다. 그래서 그에 대해 서술할 수는 있지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혹자는 그를 무자비한 사형집행자, 지식인들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환자, 홍위병을 선동하여 현대판 '분서갱유'를 일으키고, 스스로 황제처럼 행동한 자가당착적인 인물로 혹평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뛰어난 전략가, 애국자, 교사, 정치가, 철학자, 계관시인, 민족의 영웅, 그리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방자라는 것까지를 모두 합친 위대한 인물로 극찬하기도 한다. 그 전부일지, 일부일지,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닐지는 각각의 입장과 현대 중국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이론을 세웠으나 혁명을 하지는 못했다. 레닌은 혁명은 했으나 사회주의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스탈린은 제도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나 인간의 사상혁명은 못했다. 모택동은 이론을 세우고, 혁명을 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인간 혁명을 하고 있다. 모택동은 마르크스· 레닌·스탈린을 합친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평가는 앞으로 시간이 고증해 줄 것이다. 생존 시의 인간의 평가를 역사가 긍정적으로 고증해준 인물도 있고 역사에 의해서 그것이 반증된 사례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 이영희의 글, 「8억 인의 교사를 자처한 모택동」 중에서 -

1976년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에는 약 7천만 개의 초상화가 걸렸다고 한다. 이미 마오가 주도한 문화혁명 등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가가 나왔고 혁명 후 그의 과실에 대하여 많은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무엇이든 그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아침 일찍 "모주석 기념당(毛主席 記念堂 )"으로 향했다. 기념당은 보통 아침 8시 30분부터 11시 30분 사이에만(오후의 개방 여부는 요일에 따라 다름) 문을 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벌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다만 마오에게 바치는 꽃다발 이외에는 가방이나 카메라 등 일체의 소지품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었다. 옷자락 밑에 뭔가를  숨기고 들어가다 지적을 당해 대열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입구 어딘가에 10유안에 짐을 보관해 주는 곳이 있다고 들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내가 짐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대열에서 빠져나가 나와 딸아이만 들어가게 되었다. 대열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기념관으로 밀려 들어갔다. 기념관 안에서의 관람은 정말 허망한 것이었다. 투명한 수정관 안에 안치된 '모주석'의 시신은 가슴 위로 붉은 중국 공산당기가 덮여 있었다. 배례객은 멀찍이 떨어진 길을 따라 바쁜 사람처럼 지나가야 했다.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시간을 지체하여 대열의 흐름이 멈추면 지켜보던 안내(경비?) 아저씨가 득달같이 달려와 빨리 걸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도대체 '경건한' 마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에 대하여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그저 서둘러 나가기 위해 들어온 곳 같았다.

이곳에 있는 마오 주석의 시신이 진짜인가 아니면 밀랍 인형인가에 대해서는 의견도 분분한 모양이다. 공식적으로는 진짜 시신으로 되어 있다. 2억 유안의 돈과 연인원 7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어 마오의 사망 1주기인 77년 9월 9일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 최선의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공산주의를 그 대안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회 혁명과 인간 혁명을 목표로 커다란 대가를 치른 중국 사회에는 한두 가지쯤 우리와는 다른, 혹은 우리보다 나은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치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나 역시 현재의 중국 사회의 모습을 대하여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그들 사회에 있는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와 동일한 경우가 허다했다.
차이가 있다면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차이일 뿐이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여행이나 업무 출장 시에 어떤 나라에서건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내가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켰음에도 언젠가 출장 중에 만난 한 중국 젊은이는 만약 중국에 유일당인 공산당 이외에 다른 당이 생긴다면 공산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단언을 하여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이 지금 어떤 모습이건 혹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건 중국 역사에서 마오와 중국 공산당이 이루어낸 1949년 혁명의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어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 오늘날 어떤 문제가 있다면 마오에게도 중국에게도 그건 '그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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