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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지난 여행기 - 1999북경11

by 장돌뱅이. 2017. 9. 4.

20. 폐허의 원명원 (圓明)
이른 아침 우리는 남쪽 문을 통해 원명원(위안밍위안)으로 들어갔다.
문안에 들어서니 이제껏 우리가 북경의 황실 유적에서 보았던 금빛 기와의 거대한 건물 대신에
잡초 사이로 난 소롯길이 낮은 언덕을 돌아 넘어가고 있었다. 몇몇 노인이 낚시대를 드리운 호수에는
파란 하늘이 시린 모습으로 잠겨 있었고 길가의 잡초는 벌써 노랗게 퇴색한 모습으로 늦가을의 여린 햇살 아래 한가로웠다.
가끔씩 자전거를 탄 사람이 옆을 지나갈 뿐인 싫지 않은 조용함 속을 우리는 걸어갔다.

한 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어떤 곳에 가면 누구나 조금쯤은 감상적이 된다.
퇴락한 빈집이나 운동장에 가득 잡초가 돋아난 시골 폐교의 깨진 유리창, 아니면 답사 여행때 만나게 되는 텅 빈 폐사지
- 금빛 불상도 화려한 단청도 웅장한 대웅전도 없이 그저 세월의 이끼가 낀 돌탑만이 무심히 서있는 옛 절터에 서면
우리는 문득 무언가 잔잔히 가슴을 저며오는 스산한 기분에 젖게 된다.

원명원의 주요 건물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장춘원(長春園)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청의 건륭제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명하여 베르사이유 궁전과 비슷하게 짓도록 했다는 해안당(海晏堂)가 있었다는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버리고 지금은 깨진 석재만 뒹굴고 있었다.
그 곳에는 소풍나온 초등학생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들의 소풍도 우리와 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싸온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쉴 사이없이 재잘거리고. 어디서건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유쾌한 음악이다.


나는 방치된 석재 사이를 돌아보며 이 곳을 파괴한 서양인의 무지함을 생각했다.
그 때 그들은 그들의 힘을 꼭 이런 식으로 과시해야만 했을까?
중국도 자신들의 화려했던 옛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허물어진 유적 복원에 정성을 쏟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곳은 서양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증거하는 유물로 남겨두면 어떨까?
폐허에서만 느껴지는 사색의 기운도 나쁘지 않거니와 지금 해맑은 목소리로 달음질치는 저 아이들에게
불과 100년 전에 있었던 침략의 역사를 가르치는 생생한 현장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21. 서태후와 이화원
(頤和)
서태후는 청조말 함풍제(咸豊帝)의 황후였다.
함풍제가 죽자 다섯 살 난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동치제(同治帝)였다.
그 후 13년 동안 그녀는 어린 황제를 끼고 섭정(攝政)을 시작했다.
아들이 18살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다시 여동생의 세 살난 조카를 광서제(光緖帝)로 즉위 시켜 섭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청나라 제11대 황제로 등극한 광서제는 16세가 되자 친정을 시도하였다.
그는 서양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재원으로 지원함은 물론
거국적인 모금까지 벌이게 하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해군 건설 경비 3천만냥을 유용하여 기존의 황실 정원의 대규모
재건 공사를 한 후 이름을 청의원(淸漪, 칭이위안)에서 이화원(이허위안)으로 개칭하였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화원의 모습은 서태후 덕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때에 서양은 식민지 경영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1894년 조선의 동학농민전쟁을 구실로 청일전쟁이 벌어졌을 때에 청나라 해군은 일본군에게 힘없이 패하고 말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일 그때 청나라가 이화원 재건에 기금을 유용하지 않고 해군을 제대로 키웠더라면
일본군과 싸워 이겼을 수도 있고 그랬더라면 조선의 운명도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문제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구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광서제의 정치실권을 잡기 위한 노력은 서태후의 무술정변으로 좌절되고 이후 광서제는
이화원 안의 옥란당에 10여년간 갇혀 있다가 1908년 죽게 된다. 그 뒷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어린 부의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로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바다를 방불케 할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한 호수 곤명호(昆明湖 쿤밍후)는,
자연적인 호수가 아니라 사람이 땅을 파서 만든 것이라 한다.
이 호수를 만들 때 파낸 흙을 쌓은 것이 바로 옆에 있는 만수산이다.
이화원의 불향각은 이런 만수산 정상에 위치했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곤명호는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의 뛰어난 경관을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이곳은 진시황제가 시작한 만리장성의 의미와는 또 다른 의미의 권력과 향락과 사치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외세의 침략 앞에 이런 말도 안되는 엄청난 공사로 국력을 낭비하고
어떻게 나라가 온전하길 바랄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동궁문으로 들어가 인수전, 옥란당, 덕화원을 돌아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갖가지 그림이 붙어있는 장랑을 통하여 만수산 불향각에 올랐다가
대리석으로 만든 배(움직이지는 못함) 석방(石舫)이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다시 배를 타고 곤명호를 건너 신궁문으로 나왔다.

아름다움에 더하여 놀라움과 진기함이 있는 장소였다.
서태후의 그림자만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서태후가 없었다면 
이곳도 없었을 것이니 우리가 더듬는 과거의 유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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