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기사 소설을 읽느라 보냈다.
그의 머리 속은 기사 소설에서 읽은 전투나 결투, 부상, 사랑의 속삭임, 연애, 번민,
그리고 있을 수도 없는 황당무계한 사건과 마법과 같은 모든 종류의 환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자기가 읽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모두 진실이라 판단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편력 기사가 되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은 편력 기사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고자 하였다. 모든 종류의 모욕을
쳐부수고 수많은 수행과 위험에 몸을 던져 그것들을 극복하면 영원한 이름과 명성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편력 기사로서 가문과 고향을 영예롭게 하고자 성에 고향의 이름을 붙여 스스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불렀다.
스페인어의 '데(de)''는 '∼의' 혹은 '∼ 출신의'라는 뜻의 전치사이므로 '라만차의 돈키호테'라의 의미겠다.
나중에 ‘편력 기사들의 옛 관습에 따라’ ‘슬픈 몰골의 기사’ 혹은 ‘사자의 기사’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그는 낡은 칼과 창과 투구를 꺼내 깨끗하게 손질하고 피부병 걸린 자신의
비루한 말에게 "로시난테"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기사의 명성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기 위해 그의 '모든 기억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이름을 지었다가 지우고 뺐다가 붙이고 다시 없애기를' 나흘동안 거듭한 끝에 지은 것으로
세상에서 제일 가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편력기사로써 겪게 될 온갖 모험의 영광을 (어딘가에서 어떤 악한 거인을 만나 때려눕혔을 때)
돌릴 상상 속의 사랑하는 귀부인도 만들었다. 근처에 사는 농사꾼 처자인 알돈사 로렌소를
자신의 상상만으로 둘시네야 델 토보소라 부르기로 했다.
이 처녀의 고향이 엘 토보소였기 때문이다.
*위 그림 출처 : 『돈키호테』(열린책들 간행) 삽화 중에서
마침내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종자(從者) 산초 판사를 거느리고 길을 떠난다.
그는 주변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내 염려는 돈키호테 이 양반아, 그러니까 자네가 언급한 그 많은 편력 기사 무리가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과 뼈를 가지고
진정 존재했던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네. 오히려 모든 것이 허구요 우화며 거짓말이고(…)”
“그게 바로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또 다른 실수지요.”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그들은 그런 기사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여러 기회에 걸쳐서 몇 번이나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이 잘못을 진리의 빛 속으로 끌어내려고 노력했지요.(···)“
여행 초 우연히 만난 객줏집 주인을 성주로 착각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억지로 매달려 기사 서품식을 치른다.
“나의 치장은 무기, 나의 휴식은 전투”라고 자못 당당하게 외치면서.
기사가 된 그는 풍차와 양 떼를 적으로 간주하여 거칠 것 없이 돌진하는 황당한 모험을(?) 벌인다.
*"아이고 맙소사! 제대로 살피고 일을 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건 풍차라고요!"
(출처는 위와 동일)
심지어 자신이 연인으로 삼는 둘시네아 엘 톨보소가 시골 농사꾼 여인임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이 마법사의 벌이는 희롱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번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다.
"사악한 마법사가 나를 추적하여 나의 두 눈을 안개로 덮고 비구름으로 씌워,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직 내 눈에만 그대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운 자태와 얼굴을
가난한 시골 농사꾼 여인의 모습으로 바꾸어 둔갑시켰군요!“
그런 돈키호테도 제 정신이 드는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제법 논리정연한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자유라는 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것들 중 하나라네.
땅이 가진 보물이나 바다가 품고 있는 보물도 자유와는 견줄 수가 없지.
자유를 위해서라면 명예를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 수 있고, 또 마땅히 걸어야 하네.“
그러나 돈키호테의 허황된 삶의 여정 위에서는 황당한 일이건 논리정연한 말이건
상관없이 그의 모든 언행은 공허해서 희극적이고 진지해서 비극적이었다.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주위와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가수 하덕규가 부른 노래 「가시나무새」의 노랫말처럼
"돈키호테 속에는 돈키호테가 너무 많아서 (아니 돈키호테만 있어서)"
그에게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삶에 스며들기가 힘들었고 서로의 삶을 공유할 수도 없었다.
그가 갈구하는 진지한 모험의 과정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란 대체로 그를 무시하거나 농락했을 뿐이다.
그는 끝내 '진지함'을 버리지 않는다.
그를 향한 거칠고 통렬한 비난을 들으면서도.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 그토록 숱하게 등짝을 두들겨 맞고도 어떻게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 넌 미치광이야. 너 혼자서, 그리고 네 광기의 문 안에서만 미친 짓을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게?
그런데 너는 너와 교제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미치광이나 바보로 만드는 소질을 갖고 있단 말이야. (···)
네 집으로 돌아가, 바보야. 그리고 네 집 살림이나 네 처자식이나 돌보란 말이야.
네 골수를 좀 먹고 네 이해력를 걷어 가버리는 그런 터무니 없는 짓거리는 집어치우라고.”
돈키호테는 ‘하얀 달의 기사’와 귀향을 전제로 한 대결에서 패배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얀 달의 기사'는 돈키호테를 귀향시키기 위해 변장을 하고 온 고향사람이었다.
귀향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아 돈키호테는 돈키호테가 아닌 원래의 알론소 키하노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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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른바 '고전'으로 알려진 책들을 읽는 중이다.
"서구적 시각만이 아니라 제3세계의 시각도 아우르는 진정한 세계문학이 필요하다"는
(막걸리 잔 앞에서 얻은) 어설픈 논리로 사실은 어느 고전을 읽는 것에도 게을렀던
나의 지난 시절을 반성하면서.
아주 어릴 적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서 『돈키호테』를 읽었던 것 같다.
아니면 『새소년』이나 『소년세계』, 『어깨동무』같은 어린이 월간지에서 읽었거나
같은 제목의 만화로 읽었는 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대목은 종자인 산초 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 뿐이다.
완역본 돈키호테는 1, 2권으로 무려 1,800쪽에 달하는, 매우 긴 장편 소설이었다.
책을 읽는 즐거움 속에는 거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는 행위도 포함된다.
나는 돈키호테완 달리 허상(虛想)이 아닌 진상(眞想)만 좇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풍차를 향한 돌진처럼 진지할수록 상대방에게는 희극이 되고 내 자신에게는 비극이 되는
어떤 것들을 얼마나 많이 품고 저지르며 살아왔을까?
"내 골수를 좀 먹고 내 이해력을 걷어가버리는 터무니 없는 짓거리"로
"나는 물론 나와 교제하는 사람들까지 바보로 만든"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며 돈키호테를 비웃다가 문득문득 뒷덜미가 송연(悚然)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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