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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2017년의 기억들

by 장돌뱅이. 2018. 1. 2.

2017년이 갔다.
아내와 함께 꿈꾸는 새해 소망은 늘 같다.
"지난 해만큼만 새해에도 살자!"
새로운 시간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대한 평가 절하가 아니다.
새로운 게 싫은 '꼰대'가 된 탓도 아니다.
단지 무엇을 더 얻기보다 이미 누린 것, 지금 가진 것에 자족하자는 뜻이다.


2017년 동안:


1.살았다
동갑인 아내도 나도 환갑의 나이를 살았다.
기념으로 몰디브를 다녀왔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딸아이네가 보내준 터라 우리 나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 하는 느낌도 드는 여행이었다.







2. 되었다
아내와 함께 삶을 나눈 지 33년이 되었다. 
기념으로 둘이서 방콕으로 갔다.

술잔을 부딪치며 찬찬찬!
"그대와 함께 한 33년!
ANOTHER 33년을 향한 꿈!"

( http://jangdolbange.tistory.com/1640?category=391887 )




3. 자랐다
손자 친구가 무럭무럭 자랐다.
돌이 되기 전인 1월 손자 친구와 방콕을 여행했다.

손자 친구와 열대 지방의 수영장에서 노는 건 아내의 꿈이었다.
이 여행에 자신을 얻어 8월에 마카오를 여행했으나
친구는 갑작스런  고열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우리의 혼을 빼놓기도 했다.

친구는 아플 때도 씩씩하게 잘 먹는다.
성격도 명랑해서 잘 웃고 장난도 잘 건다. 신명나는 춤은 압권이다.
이제는 짧은 단어를 어설프게 발음할 줄도 안다.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의 관심이고 즐거움이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은
운동이며 놀이이자 휴식이다.










4. 걸었다
2017년 동안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서울 도성길을 걸었다.
일부 구간은 아내와 동행을 했다. 친구들과 동행한 구간도 있다.
특히 도성길은 수 차례를 완주했다.

새해에는 달리기를 줄이고 걷기를 늘일 생각이다.
첫 도보길은 아마 지리산 둘레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위에 서있고 싶다.







5. 보았다
뮤지컬이나 연극 등 무대공연을 보지 못한 것은 2017년의 아쉬움이다.
영화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예년에 비해
전시회도 많이 가보지 못했다.
현실이 더 극적이었다는 어설픈 핑계를 붙여 본다.
공연 관람이라기에는 쑥스럽지만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 3차전 잠실 경기를 보러 갔다.
3차전을 기점으로 연승을 한 KIA가 오래간만에 우승을 했다. 짜릿했다.


6. 먹었다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더라도 먹어야 산다.
아래 사진은 아내와 내가 2017년 최고의 식당으로 꼽은 서촌 "갈리나데이지" 의 음식이다.
집에서 내가 만드는 집밥의 맛과 꾸밈도 이런 경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욕심인 줄 안다. 더 공부하고 노력하자는 다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새해에는 몇 가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서 아내의 엄지척을 받아야겠다.


7. 읽었다
이른바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들을 읽고 있다.
학생 시절 읽은 것을 다시 읽는 것도 있고
제목과 작가가 귀에 익숙하고 내용도 아는 것 같지만 기실 처음 읽는 것도 있다.

올해 읽은 책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새삼 인상 깊다.
『죄와 벌』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때인가 국어 선생님으로 부터였다.
가난한 대학생이 도끼로 노인을 살해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그 부분을 특별히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다른 부분은 솔직히 지루했고 어려웠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헷갈리기 일쑤였다.

다시 읽어도 살인의 전후 부분은 여전히 극도의 긴장을 유발했다.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 가히 최고의(?) 묘사였다.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사건 전 우연히 들린 한 술집에서 옆 좌석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리석고, 의미 없고, 하찮고, 못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 먹는,
 바퀴벌레보다 나을 것 없는 인색한 노인 하나를 죽여, 그의 돈으로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면, 그 작은 범죄 하나는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라는 주정이자 주장이었다.

그 말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적인 신념을 지닌 비범한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할 필요가 있을 때는 자기 내면의 양심에 따라서 모든 장애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주인공의 평소 고민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끝내 가슴 속에 도끼를 품고 노파의 집을 찾아간다.

더 이상의 진행과 결말은 잘 알려져 있다.
내겐 소설의 전개 부분이 주는 질문만으로 충분하다.
"목적이나 의지만 선하면 모든 수단은 같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렇지 않다는 상식적인 해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 총을 들어야 했던 남미 어느 카톨릭 신부의
"어느 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겸허한 용기", 고뇌와 행동
-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게릴라의 경솔한 폭력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진실함을 인증하는
사람들의 폭력" 마저 결코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렵다. 성급한 결론은 자칫 도식이 되고 독단이 되기 쉽다. 




8. 들었다
2016년 초겨울부터 2017년 3월까지 대부분의 토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누구나 꽃"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9. 일했다
퇴직을 하면 숫자로 표시되는 실적 압박에서 벗어난 일을 해보고 싶었다.
별다른 능력도 없는 터라 아파트 경비원을 생각했다.
때마침 경비원에 대한 주민들의 '갑질'이 사회 이슈가 되어서인지 아내와 딸아이가 만류를 했다.
나라에서 시켜주는 교육을 받고 외국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투덜거릴 즈음 어느 치과 병원에 청소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아침이나 저녁(진료 시작 전이나 후) 하루 3시간을 투자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내는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장돌뱅이 하는 일을 누가 말리랴' 하는 투로 묵인해 주었다.

나로서는
적당히 운동도 되는 좋은 일이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눈치코치·옥신각신의 업무 대신에
말 없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정신을 맑게 했다.

청소를 하고 난 뒤 아무도 없는 병원 홀에 혼자 앉아 커피나 차를 마시는 적막한 시간도 좋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는 손자 친구와의 놀이시간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방해는커녕 덕분에 친구에게 장남감도 사줄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아내와 자주 하는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단 하나의 문제가 남았다. 
일단 2018년 봄까지는 짧은 근거리 여행만 하기로 하고 생각해 볼 생각이었다.
근데 이런저런 다른 사정이 생겨 40일만에 다시 백수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잘 되었다고 박수를 쳤지만 나로서는 좀 아쉬운 일이었다.


10. 미처 기억하지 못한 것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 풀코스를 여러 번 완주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조금 밖에 없지만 그만 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계속 달리는 이유는 그에게 가능한 것이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그의 '달리기'를 '사는 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불과 엇그제로 끝나버린 2017년에는 위에 나열한 몇 가지 일보다 엄청나게 많은 무수한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일상의 작고 시시하고 무덤덤하고 비효율적이고 공허한 일들일 것이다.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나만의 비밀이거나 부끄러운 일들일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을 모두 위 빈칸의 네모 속에 담어두고자 한다.
어쩌면 '효능이 있는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그것이 나의 진실된 모습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삶에
중요한 것들은 거기에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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