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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밥맛' 없는 이야기

by 장돌뱅이. 2018. 1. 18.


*위 사진은 글 내용과는 상관없는 그냥 '아무' 사진임.


이야기 하나
1906년
미국의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 UPTON SINCLAIR 는 『정글(THE JUNGLE)』을 발표했다.
이주노동자인 주인공 유르기스의 눈을 통해 당시 미국 육류 가공 공장의 더러운 환경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배가 찢어지거나 이미 죽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소들은 은밀하게 도살되어 다른 고기들과 구별되지 않게 뒤섞여졌다. 
작업자들은 그런 소들을 '다우너 DOWNER'라고 부르며 매일 하는 일이라고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소 비슷한 놈'이라고 부르는 소들도 있었다. 온몸이 종기로 뒤덮여 차마 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소들을 도살하려면 온통 더러운 고름이 얼굴에 튄다고 했다.

통조림과 소시지용 고기들을 만드는 과정은 더 끔찍했다.
고기는 썩은 부분은 물론이고 버려야 할 부분까지도 깡그리 뒤섞어 만들었다. 
가공된 고기는 물이 새는 허름한 창고에 저장되었다. 바닥엔 톱밥이 널려 있고
작업자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걸어다니고 침도 뱉어대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쥐가 들끓었다. 
그리고 쥐의 분비물과 죽은 쥐까지도 그대로 버무려 제품이 만들어졌다.
화공약품 처리 기술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화학적인 기적은 어떤 종류의 고기라도
마음대로 원하는 색깔과 향기 그리고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상한 햄이나 반품된 불량, 곰팡이가 핀 제품의 재활용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정글(THE JUNGLE)』의 폭로에 미국 사회는 들끓었다.
미국인들은 대통령에게 엄청나게 많은 항의 편지를 보냈고 고기 가공업의 개선을 촉구했다.
조사단도 파견 되었다. 그 결과 식품의약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 제정이 되었고
미국식품의약국(FDA)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둘
『동물농장』과 『1984』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조지오웰은 GEORGE ORWELL은 1933년에 소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을 발표했다.
두 도시에서 자신이 체험한 노숙과 접시닦이 등의 밑바닥 생활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생생한 현장 보고서이기도 하다. 

 

종업원 구역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X호텔은 역겨울 만큼 불결해진다.
우리가 일하는 저장실에도 어두운 구석마다 해묵은 먼지가 쌓여 있고, 빵 상자에는 바퀴벌레가
붙어 있었다.
한번은 내가 마리오한테 그것들을 죽여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는 "이 가엾은
곤충들을 왜 죽이나?" 하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또 내가 버터를 만지기 전에 손을 씻으려 하자
다른 사람들이 비웃었다. (···)
우리의 우선적인 의무는 시간 엄수였으므로 불결하게 마구 일을
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했던 것이다.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프랑스 요리사는 자기가 먹지 않을 스프에는 침을 뱉는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진술이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함이
아니다.
그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불결하다. 왜냐하면 음식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더럽게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석 요리사에게 점검을 받기 위해 스테이크를
가져가면
그는 이것을 포크로 다루지 않는다. 그는 손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올려서 철썩 내던진다.
그러고선 엄지손가락으로 접시를 훓어서 국물을 핥아 맛을 본다. 다시 한 번 훑고 핥은 다음에
몇 걸음
물러서서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화가처럼 고깃각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날 아침만
해도 백 번이나
핥았을, 살이 통통 찌고 불그스레한 손가락으로 고기를 지그시 꼭꼭 눌러본다.
만족하면 행주를 집어서
접시에 난 손자국을 닦아 내고 웨이터에게 내준다. 그러면 웨이터 역시
자기 손가락을 고깃국물에다 담근다.
그 손가락으로 말하자면 기름 바른 머리를 줄곧 쓰다듬던
더럽게 기름때가 묻은 손가락이다.
파리에서 한 접시에 10프랑 이상 치르고 먹는 쇠고기 요리라면
이런 식으로 여러 손가락이 들락날락했다고 확신해도 좋다.


결과적으로 음식을 비싸게 사 먹을수록 더 많은 침과 땀을 먹는다는 말이 된다.
먹음직한 음식은
시간 엄수라든가
그럴듯해 보이는 외양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는 불결함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호텔 종업원들은 음식을 장만하느라 너무나 바빠서 그것을 먹기 위해 만든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 X호텔에서 정결하게 만드는 유일한 음식은 종업원과 주인이 먹을 식사이다.
(···) 이런데도 X호텔은 파리에서 가장 비싼 열두 곳 호텔 중 하나였다. 손님들은 기상천외한 값을 치렀다.

주방이 점점 더러워지자 쥐들도 점점 용감해졌다. 쥐덫으로 두어 마리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저분한 주방을 휘둘러보면서 나는 이렇게 불결한 음식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했다.
날고기가 바닥 쓰레기 더미 속에
놓여 있고, 기름 덩이가 엉겨붙은 차가운 스튜 냄비가 곳곳에 뒹굴고,
개수대는 막힌 데다 기름때가 긴 주방을 둘러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른 세 사람은 이보다 더 더러운 곳에도 있어봤다고 했다. 그리고 쥘은 더러운 것을 보면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
쥘은조금 한가한 오후 시간이 되면 으레 주방 문간에 서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를 조롱했다.

"이런 멍텅구리! 뭣 때문에 그 접시를 씻나? 바지에다 닦으란 말이야. 손님이 알 게 뭐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음식점에서 하는 일이 뭐냐고? 닭고기 썰어주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렸어.
그러면 손님한테 사과하고 굽실굽실 절을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러고서 5분 후에 다른 문으로 들어와.
아까 그 닭을 들고 말이지. 고작 그런게 음식점에서 하는 일이야" 등등.


(사실 소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의 주제는 먹거리가 아니라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이다.
오웰은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각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 것이다. 
따라서 위 인용 부분은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임을 부기해 둔다.)


이야기 셋
오래 전 내가 근무하던 공장의 공장장은 식당에 대한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
그는 호텔 부속 식당이나 잘 아는 한두 곳 단골횟집 이외의 식당은 철저하게 외면을 했다.
"무얼 어떻게 요리하는 줄 알고 아무 식당을 가겠어."  회식 자리에서 그가 말한 적이 있다.
"호텔은 믿을 수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냐?"하고 이견을 꺼내기에는 나와 그 사이에 계급 차이가 '넘사벽'이었다.
그에게 위 두 가지 소설을 권하면 뭐라고 답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잠시 놀라겠지만 호텔 음식에 대한 신뢰가 깊으니 아마 백년 전 이야기라며 별로 신경쓰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지저분함이 개선된 사회적 발전의 이면에 또 다른 그림자는 없을까?
가축에 대한 성장촉진제나 항생제 과용의 문제는 이제 식상한 뉴스로 별로 주목받지도 못할 정도 아닌가.
 '프랑켄푸드'(Frankenfood : Frankenstein + food)라고 불리는 유전자변형식품(GMO :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등이 합법과 과학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어릴 적 만화에서나 보던 호박만한 감자나,
줄기에는 수박을 달고 뿌리에는 고구마가 자라는 식물을 밭에서 본대도 놀라운 시대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GMO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라고 하는 통계도 있다.
자본의 논리는 결국 이익이 우선이기에 적절한 제도적 제어 장치가 없으면
원가구성의 주요 요소인 재료비 절감이란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GMO는 식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대부분의 식품들의 원료가 된다고 한다.
그것이 인류의 축복이 될 지 '프랑켄슈타인'처럼 재앙의 괴물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두려운 것은 가습제 살균제처럼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많은 고통과 희생을 치룬 뒤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야기 넷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내와 나는 아무 거나 먹는다. 
비싼 값을 주어야 하는 유기농 식품류나 자연산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는다.
관심을 기울여본 적도 없다. 미국에서 살 때는 "NON-GMO"라는 표기가 식재료에 붙어 있어 나름 구분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제화 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것이나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충 먹는다. 환갑이야 요즘엔 청춘이라지만 그래도 제법 나이를 먹었으니 겁날 게 별로 없어 생긴 배짱?이다.
다만 아직 젊은 딸아이 부부나 특히 손자친구를 볼 때는 걱정이 된다.
결국 모든 문제가 그렇듯 먹거리의 문제도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문제이다.
어느 책 제목을 빌자면 "오래된 미래"로 돌아가자는 결단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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