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28 - 제천과 그 부근

by 장돌뱅이. 2018. 3. 11.

한때 아내와 함께 우리나라 이곳저곳의 불탑을 보러 다닌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나 불교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냥 탑이 좋았다.
탑 자체만 보면 불국사의 석가탑이 가장 아름다워 좋았지만
텅 빈 폐사지에 홀로 남아 있는 석탑이 주는 호젓한 분위기를 더 찾아 다녔다.

탑(塔)은 부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다. 정확히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놓은 곳이다. 
그러나 모든 탑에 진신사리를 모실 수가 없으므로 이른바 법신사리라고 부르는 불경이나
작은 금동불 등 공경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신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면 탑에 합장을 하거나 탑돌이를 하며 기도 하는 것이다.

탑은 불교 전파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사용된 재료가 다르고 모양도 변해왔다.
중국에선 처음에는 목탑이 지어졌으나 곧 점토를 가마에서 구워 만든
벽돌을 사용한 전탑이 자리를 잡았다. 이미 발달된 벽돌집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목탑(황룡사터,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등)이 많이
지어졌을 것이나
전란 등으로
불 타 없어졌고 견고한 재료를 찾아 전탑이나 석탑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중국과는 달리 벽돌 생산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는 풍부한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탑을 세웠다.
이를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경주 분황사탑, 의성 탑리 오층석탑, 영양 봉감오층석탑 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대략 1,500기 이상의 탑이 있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이 석탑이고 전탑은 다섯 기만 존재한다.
전탑 한 기는 여주 신륵사에 있고 나머지 네 기는 경북 지방에 남아있다.  
전탑과 모전전탑이 한반도의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분포가 흥미롭다.

제천의 첫 방문지는 장락동 칠층모전탑이었다.
탑은 칠층의 높이에 몸매도 우람한데다가 도드라진 토대 위에 세워져 있어 장대한 느낌을 주었다.
옛 마을 들머리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처럼 탑은 오래도록 흘러간 시간의 무늬를 제천과 함께 나누었으리라.
원래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누가 언제 세웠으며 언제 스러졌을까?
상상으로워야 하는 폐사지만의 소슬한 여백은 늘 감미롭다.  

탑 옆에 새로 지어진 장락사란 이름의 작은 절이 있다.
보통 탑은 절에 속해있지만 이곳에선 탑이 절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다. 절은 조용했다.
절 가까이 차를 세우고 탑을 돌며 구경을 하는 동안 들고나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판의 글로 탑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모전탑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 기단으로서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1층 몸돌 네 귀에 화강암으로 된 돌기둥을 세웠다. 2층 이상의 몸돌이나 지붕돌은 전부 점판암을
잘라서 쌓아 올렸으며, 특히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형식과 같이 상하에서 층단을 이루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 층의 줄임 비율이 적당하여
장중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의 심한 피해로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 해체 복원하였다.




제천역 앞 시장 주변에 있는 보령식당에선 장칼국수 낸다.
고추장을 풀어 만든 국물 맛이 아주 칼칼했다.
혹시 너무 매울까봐 만두국도 시켰다. 아내는 젊었을 때와는 달리 매운 걸 잘 못 먹는다.
허름한 벽엔 낙서가 가득하고 테이블은 서너 개뿐이었다.
주인은 테이블과 바투 붙어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요즘 흔한 텔레비젼 음식 프로그램에 나오면 도움이 될 텐데요."
손님이 우리뿐인 한가한 시간인지라 어색함에서 벗어날 겸 말을 건네자 주인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구 텔레비젼! 관심없습니다. 한참 전에 내고향6시에 한번 나왔다가 홍역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안 나와도 오는 손님 받기도 벅찬데요 뭘."
무슨 홍역이냐고 물으려는데 느긋하게 한마디 덧붙인다.
"이 식당이 50년이 넘었어요.자부심이 은근히 묻어나는 말투다.
충남 보령에서 온 아버지가 처음 개업을 하였고 이제 곧 아들에게 물려주겠단다.
3대로 이어지는 식당인 것이다. 주인장의 말투에서 느꼈던 자부심의 근거인 듯했다.








상호가 정겨운 "
덩실분식"에서 찹씰떡과 도너츠를 몇 박스를 샀다.
도너츠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몰려든 차들이 가게 앞에 북적였다.
은근한 단맛의 팥소가 든 찹씰떡과 졸깃한 도너츠의 맛이 괜찮았다.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정조에 이어 조선 제 2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정순대비는 수렴청정을 맡으면서 정치적인 반대파인 시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남인 시파에 천주교 신자나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1801년 1월 10일 이른바 '사학(邪學)'을 배척한다는 전교가 내려졌다.

오늘날 이른바 사학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파괴하고 교회를 배반하여
스스로 오랑캐나 짐승의 지경으로 떨어진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차로 오염되어
그릇된 길로 나아감이 마치 어린애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측은하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 『순조실록』 중에서 -


신유박해는 철저하고 무자비했다. 1년 내외에 전국적으로 300명이 넘는 교인이 학살되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이 고문으로 옥사하고 이어 이승훈, 정약종 등이 사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배를 당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자수하였으나 새남터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국 사람은 본래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논란이 있었지만 금압정책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형장으로 내몰았다.

제천시에서 서북쪽으로 차로 20분 정도 달리니 '배론(혹은 주론舟論)'에 이라는 마을이 있다.
5번국도에서 골짜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으로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현재는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신유년 박해를 피해 온 황사영이 토굴 속에 몸을 숨기고 쓴 '황사영 백서(帛書)'로 세상에 알려졌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은 한때 정조의 총애를 받는 인재였으나 처삼촌이었던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관직의 길을 포기했다. 그의 세례명은 알렉시오였다.

황사영은 천주교 탄압의 실상을 북경교회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흰 비단에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1만 3,311자로 적었다. 내용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의 실상과 그에 대한 요청 사항이었다.
백서는 발각되었고 황사영은 체포되어 서소문에서 처형되었다.

천주교에서 황사영은 복자로 추대되어 시복절차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황사영의 백서에 대한 일반인의 감정은 천주교의 그것과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주교 신자인) 나 역시도 그렇다.
천주교 선교를 위해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하고 서양의 군대를 파견해 침략해 달라는 내용은
수많은 사람이 죽는 급박한 상황이고 시대적 의식의 차이가 지금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와 부재와 자신 신앙에 대한 지나친 골몰에서 나온 과도한 호소로 생각된다. 

겨울의 끝무렵의 배론 마을에는 아직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아내와 함께 '순교자들의집' '성 요셉 성당' '순교 현양탑'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등등의 건물과
여러 조형물 사이를 걸었다. 돌아나오는 길엔 언덕 중턱에 있는 성직자 묘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황사영의 글 속에 표현된 "양떼가 흩어져 달아난 것처럼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길에서 혜매며
눈물을 삼키고 숨 죽이고"
있어야 했던 오래 전 그 시절 이 땅의 생령들에게 짧은 기도로 위로를 보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위 사진 : 배론천주교성지와 황사여이 피신해 있던 토굴


짧은 여행의 마지막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에 있는 용소막성당이었다.
배론성지의 충청북도에서 강원도로 도 경계를 넘었지만 실제 거리는 멀지 않았다.

1915년 가을에 완공된 성당은 붉은 벽돌 양옥의 아담한 크기였다.
배론성지와는 달리 5번 국도에 가까이 드러난 곳에 있지만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그 겸손한(?) 크기에 있는 것 같았다.

옅은 진눈깨비가 계속 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아내와 성당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미사에 참석하면 가장 듣기 좋은 신부님의 말씀지만 정작 일상에서 평화를 느끼는 시간은 많지 않다.
아내와 같이 나누는 여행의 시간은 바로 그 작은 평화를 실감하는 시간의 일부이다.
내가 누리는 소중함에 감사를 올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