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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27 - 춘천에서

by 장돌뱅이. 2018. 3. 1.

춘천으로 가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니 이전에는 없던 고속도로가 이어진다.
2009년엔가 개통되었다는 서울-춘천 고속도로.
얼마 전에는 이어서 강원도 양양까지 개통되었다고 했다.
미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서 지금까지 동쪽으로 여행을 하지 않은 터라 처음 달려보는 길이다.
옛길은 강물과 산을 품고 달렸지만 새로 난 고속도로는 거침없이 산을 뚫고 강을 가로지른다.
덕분에 2시간이 넘게 걸리던 옛날과 달리 집을 떠난지 한 시간만에 춘천 시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춘천 죽림동 성당.
춘천 교구 전체의 중심 성당이라지만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외관이 단단하고 야무져 보인다
1949년에 신축 기공식을 하였다가 한국전쟁기에 대파되었고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세례를 받은지 몇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주일의 공식적인 미사 참석이 어색하다.
그보다는 솔직히 아내와 함께 텅빈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그 낯가림이 얕은 믿음의 표시라해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한 나의 감정이므로.
고요함이 시나브로 농밀해져 가는 작은 성당 안에서 '멍때릴' 때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같은 것에 대한
아주 미세한 자각이 무척이나 감미롭게 피어난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 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 만 성경구절을
성에 낀 창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 정세기의 「성당 부근」 -


↑핸드폰 작동 이상으로 실물 성당 사진이 날라가버렸다. 


'KT&G 상상마당 춘천'은 원래 춘천어린이회관으로 유명 건축가 김수근씨의 작품이라고 한다.

지어진 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것을 예술가와 대중에게 접점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2014년에 리모델링을 하여 다시 개관하였다고 한다.

그곳 카페에서 아내와 북한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바람과 구름이 오락가락 하는 쌀쌀한 날씨라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커피였다. 
꾸물대던 날씨가 기여코 눈을 뿌리기 시작할 때 아내와 나는 밖으로 나와 팔을 벌려 흩날리는 눈을 받았다.
어쩌면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이라고 생각하면서 개구장이처럼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강에는 유난히 길고 혹독했던 겨울의 기세가 여전히 두터운 얼름으로 남아 있었다.  
 





2010년 12월 20일 한때 청춘과 낭만의 상징이던 '춘천 가는 기차'가 멈추었다.
서울과 춘천을 한 시간만에 주파하는 현대적인 준고속열차 ITX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일반 찻길이 그런 것처럼 기찻길에도 고속도로가 생긴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강변에 들어선 백양리역, 강촌역 등 몇몇의 옛역이 폐역이 되었다.
김유정역도 그중 하나이다. 1939년에 개설된 이 역은 원래 이름이 신남역(新南驛)이었다.
인근에 소설가 김유정문학촌이 개관하면서 2004년 12월 김유정역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우리 철도 사상 최초로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딴 역명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같은 이름의 새로운 역은 옛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은 승용차로도 기차로도 가기에 힘들지 않은 곳이지만
김유정이 살았던 시절에는 접근이 쉽지 않은 아주 외진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글 중에 고향에 대한 언급이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의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래야 쓰러질 듯한 헌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밖에 못되는 촌락이다.

                                                        - 김유정의 글 「내가 그리는 신록향」 중에서 -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를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대개 김유정-황석영-이문구-박완서-··· 등이다.
김유정은 맨 처음에 온다. 어색한 까까머리를 문지르며 입학한 중학교 첫 봄에 국어선생님이 소개해준
「봄·봄」과 「동백꽃」 덕분이다. 같이 읽었던 「산골 나그네」,「소낙비」「만무방」「아내」 등등도 마찬가지다.
뭔가 코믹하면서 "알싸한 그리고 향긋" 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이 어린 시절임에도 그의 소설 속에 빠져들게 했다.
훨씬 나중에서야 그것을 "해학과 비애"라는 어려운 말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론가 이선영의 글을 더해본다.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훈훈한 사랑을 예술적으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예술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들은 흔히 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일면에서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삶과 이어져 진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해학이 비애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리하여 식민지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황에서도 민족이 건전하게 즐길 수 있고 현실의 실상을
생각할 수도 있게 하는, 드물게 나타나는 문학적 성취에 이르고 있다. 비록 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대단히 심각하다거나 포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러한 미덕을 가진 김유정의 창작들은
1930년대 한국문학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김유정역 근처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대규모로 조성된 문학촌 안에는 김유정기념전시관과 복원된 생가가 있으며 동상과 정자와 연못까지 있다.
김유정 생전에도 연못과 정자가 있었다는 말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여러가지가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 없다는 점이다.

생가 맞은편의 대규모 체험관 집단 시설은 더욱 뜬금없어 보인다.
그중 김유정이야기집은 그나마 둘러볼만 하지만 나머지 한복체험관, 도자기체험관, 염색체험관, 등은
김유정과 관련도 없고 한옥 건물의 크기도 우악스럽게 커서 김유정을 기리는 문학촌의 분위기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2000원을 가장 아깝게 사용하는 방법이 이곳의 입장료를 지불하는 일이라고 하면 누구를 모욕하는 일이될까?.

왜들 이렇게 크고 화려하게 치장하길 좋아하는 걸까?
김유정기념전시관과 작은 그의 생가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가난과 병마로 고통스럽게 살다간 김유정을 생각한다면 더욱.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독일경제학자 슈마허 말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다.

김유정은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세가 기울면서 만29살의 나이로 죽는 날까지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죽기 열흘 전 그는 가까운 친구였던 소설가 안회남에게 애절하기 그지 없는 편지를 보낸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 일으키기 어렵겠다. 팔승아!(안회남의 본명)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 돈, 돈, 슬픈 일이다. 

김유정은 1937년 3월 28일 경기도 광주의 누이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은 막국수와 닭갈비다.
왜 춘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확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막국수의 유래는 을미사변 때 의병들이 일본군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 해먹던
데서 유래한다고 하지만 의병의 할동은 전국적이었으니 막국수의 춘천유래설로는 부족해 보인다.

다만 막국수의 원료인 메밀이 병충해에 강하고 일조량이나 기온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아서

산이 많은 강원도 지역에서는 평야 지역보다 재배가 쉬운 흔한 식재료였을 것 같다.
닭갈비 유래는 더욱 애매모호하다.
춘천이 주변지역의 닭 공급처여서 그렇다는 논리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래야 어떻든 기왕에도 아내와 함께 막국수를 찾아 다닌 적도 있는 터에
춘천까지 와서 막국수 한 그릇 안 하고 갈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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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찾아간 식당은 남부막국수였다. 죽림동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막국수는 참기름 맛과 느낌
이 너무 강했다.
다른 모든 주·부재료의 향과 질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압도했다.
국수는 온통 미끈거려 젓가락으로 집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닭갈비는 일점오닭갈비 식당에서 포장을 해와 집에서 조리해 먹었다.
디테일하지 못한 너무 안이한 평가이지만 한마디로 괜찮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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