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일본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3

by 장돌뱅이. 2018. 5. 12.

아리타를 거쳐 다케오까지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나가사키역으로 나갔다.
8시31분 발 기차를 타고 30분정도를 가면 이사하야,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1시간 정도를 달리면 하이키,
다시 기차를 바꿔 타고 35분을 달리면 오늘의 중간 기착지인 아리타에 10시55분에 도착하게 된다.
꽤 번거로워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편리하고 편안한 여정이었다.
일본은 철도여행의 천국이라고 하던가. 

 






↓아리타역(有田


아리타 역에 도착하여 코인 락커에 짐을 맡겼다. 그리고 역 앞에 있는 여행 안내소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아리타에 대한 자료를 얻었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환전을 해야 했다.
일본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타의 은행에서는 어떤 외화도 환전이 불가능했다.
사가은행()에서는 환전을 위해서는 다케오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것도 '오후 3시까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 때문에 아리타에서 시간에 쫓겨 예정했던 일부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애초에는 아리타 시내를 한 시간 정도 걸어 이삼평의 비가 있는 '도조의 언덕(陶祖까지 걸어가 볼 생각이었다.
이삼평은 정유재란(1597) 때 일본에 끌려와 일본 도자기의 선조(陶祖)라고 불리게 조선인으로 아리타가
도자기 마을(로 태어나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다케오에서 환전을 해야했기 때문에 
중간 지점인
백파선(百婆仙)의 묘탑에서 다시 발걸음을 아리타역으로 되돌려야 했다. 




본격적으로 아리타를 걷기 전 아리타의 향토 음식이라는 고두부로 점심을 먹었다.
사가현 여행 안내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타카시마(高島)두부의 사진은 아기자기해 보였다.
부가된 설명에 따르면 고두부는 떡처럼 쫄깃쫄깃한 식감과 푸딩과 같은 광택이 특징이고,
간수 대신에 칡과 녹말을 섞어 만들며,
간장을 뿌려 먹으면 식사로,
콩가루와 검은 꿀을 뿌려 먹으면 스위트로 즐기실 수 있다고 했다.

두부를 좋아하는 데다가 어차피 행동식으로 빨리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리라 기대되었다.

↓사가현 여행 안내 홈페이지 속의 타카시마 고두부 사진


그런데 식당이 대로변이 아닌 이면 도로의 후미진 곳에 있었다. 간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 황당했던 건 그곳은 식당이라기보다 두부 판매점이었다. 가게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두부를 먹을 수 있다며
책상 위에 스티로폼 그릇에 든 두부를 소스와 함께 펼쳐 놓았다. 할머니의 성의를 무시하고 돌아나가기도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어색한 눈웃음을 교환해 가며 아내와 두부 한 모씩을 먹었다.
거한? 점심을 먹고 아리타 시내를 걷는 내내 아내는 나의 선택을 킥킥거리며 놀려댔다.
"일본에서 둘이서 한끼를 해결하는데 300엔이라니! 태국 쌀국수보다 저렴하네.^^"





아리타는 길 양쪽으로 도자기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을 뿐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지나는 행인도 거의 없어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로 가라앉았던 고요함이 잠시 흔들리곤 했지만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날씨는 맑고 기온도 적당해서 걷기에 최적이었다. 봄꽃이 한창이이서 더욱 좋았다.
아내와 샛길로도 들어가보며 해찰을 부리며 걸었다.

도자기 가게에 들려 구경도 하고 싶었지만 시간 때문에 창문 밖에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내일 또 다른 도자기 마을 이마리에서 볼 것이니 큰 아쉬움은 없었다.
구태여 학술 답사도 아닌 여행이니 특정한 주제에 집착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먼저였는 지도 모르겠다.
제일 중요한 건 시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아내와 장난을 치며 보내는 시간이었다. 
 













백파선 묘탑은 호온지(法恩寺)에 있다.
백파선은 임진왜란 때 도공이었던 남편 김태도와 함께 끌려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직접 도자기 가마를 운영했다.
호온지 주변 어딘가에 백파선이 운영했다고 추측되는 가마터가 있다고 한다.

아리타에 와서 이들의 번성한 도자문화를 보면 나는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가 갖고 있던 기술로, 그것도 무명 도공들이 일본에
와서 이렇게 도자기혁명을 일으킬 때 우린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는 역사의 회한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장인(匠人)을 존중할 줄 알라는 교훈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막연히 생각하기를 일본에 온 도공들은 왜놈들에게 포로로 끌려가 이국땅에서 도자기를 굽는 고된 일에
노예처럼 사역되고 있었고 고향이 그리워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고 깊은 동정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 실상엔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에 살 때 이들은 지방가마의 도공으로 천민이었다. 이들은 도자기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농사도 지어야 했고, 각종 역(役)에 나가 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이들은 도자기 기술자,
즉 장인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이 상대한 것은 번주라는 지방 최고통치자들이었다. 가라스야키에서는 어용 도자기
선생(御用燒物師)이라고 '선생(師)' .소리를 들었다. 아가노야키의 존해는 5인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쌀 15석(石)을
녹봉으로 받기로 하고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사쓰마 번주는 조선 도공에게 사농공상에서 사(사), 일본의 사무라이(侍)와
같은 신분을 제공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던 대접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예 일본성(姓)으로 바꾸고
일본인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 후손들은 더이상 조선인이 아니다. 다만 '한국계 일본인'으로 대를 이어 살아가는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중에서 -









호온지 한쪽 옆으로 눈처럼 날리는 벚꽃 그늘 아래 수 많은 묘탑이 있었다.
묘탑군 앞쪽에 있는 안내판의 도움을  받아 백파선의 탑을 찾았다.
960명에 달하는 도공을 거느린 당시로서는 파격이라 할만한 여장부 백파선의 기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키가 작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비석 몇 개가 그것이었다. 

도공들이 일본에 와서 꽃피운 도자 문화의 내력에 유홍준의 말대로 부럽고 부끄럽고 원망스럽고 화가 나지만
그에 앞서 국가에서 보호받지 못한 동족의 흔적들이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나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지만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힌 채 끌려가던 날들엔
얼마나 놀랍고 무서웠을까? 그럴 때 국가는 무엇이며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백파선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4월 말 우리나라의 단체에서 아리타에 있는 백파선갤러리에
백파선 기념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행과 사진 >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5  (0) 2018.05.14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4  (0) 2018.05.12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2  (0) 2018.05.11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1  (0) 2018.05.10
일본어보다 어려운 한글  (0) 2014.05.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