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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일본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5

by 장돌뱅이. 2018. 5. 14.

아침에 이마리(伊万里)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케오 기차역으로 나갔다. 
정확한 버스 출발 장소를 역 앞에 서있는 여러 택시 중의 한 운전사에게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내게 역 건너편 멀리 대각선 방향의 한 장소를 친절하게 가르켜 주었다.
그가 가르쳐준 장소로 가서 버스 출발 시간을 알아보려는 참에 그 택시운전수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그리곤 알아 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빠르게 쏟아 놓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알아들은 내용은 하필 이날 아침부터 이마리행 버스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택시운전수는 자신이 잘못 알려준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서둘러 달려와 준 것이다.
그와 함께 다시 기차역으로 되돌아가며
'나는 이제까지 누구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어 본 적이 있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 대신 기차로 다케오에서 출발하여 아리타를 거쳐 1시간만에 이마리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어제 아리타역에서처럼 역구내 코인 라커에 짐을 맡기고 이마리 구경에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는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
이마리역 앞에서 버스로 다시 15분 정도를 가야한다.
1675년 오늘날 이마리와 아리타 지역인 나베시마의 영주는 도예 기술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격리된 오카와치야마로 가마를 옮겼다.
이후 200년 가까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는 최상급으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 오카와치야마에는 약 30곳의 가마가 있다고 한다.

오카와마치의 버스정류장 주변은 다리 난간이나 화장실 입구에까지 화려한 문양의 타일과
도자기 파편으로 꾸며져 이곳이 전통의 도자기 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운 작은 개울을 건너니 도공무연탑이 있었다.

연고가 없는 묘지의 석주 880여 개를 피라미드 형태로 쌓은 탑이다. 
그 맨 위에 스님 모습의 지장보살을 세워놓았다.

이곳과 인연이 있는 조선도공, 고려인들의 묘비도 그속에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도공무연탑 이외에 번요(蕃窯)시대 이전에 일본으로 온 고려인 도공의 비가 따로 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마을 지도를 들고도 이 비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돌아서야 했다.

 

 



탑에서 나와 마을 구경, 도자기 구경에 나섰다.
가게마다 저마다의 특색있는 모양과 문양의 그릇과 접시, 잔 등을 팔고 있었다.
도자기를 구경할 때마다 드는 아쉬움 - 마음에 드는 건 너무 비싸고 싼 건 마음에 들지 않고 - 은
이곳에서도 여전했다. 우리는 작은 기념품을 한개를 샀다.

일본 도예문화가 조선 도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정서와 문화가 가미되어
조선자기의 은은한 색감과 검소·소박한 아름다움과는 다른 일본만의 도예문화가 되었다.
9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도자 문화가 들어왔다고 해서 우리의 고려 상감청자나 조선 백자가 중국의 아류라고 
할 수 없듯이 일본
의 도자에 대한 조선의 '원천 기술 소유권(?)' 같은 주장은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는 흔히 도자기라고 하지만 도자기는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로 구별된다.
유약을 발라 1,300도의 높은 화도(火度)에서 생산된 것을 자기라고 하고,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연질의 그릇을
도기라고 한다. 자기는 흙과 불과 혼의 합작품이다.
유약과 불이 반응하여 고온에서 자기가 만들어질 때  
유약과 흙의 상태와 성분에 따라
자기의 모습이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에 자기를 만들어 쓴 나라는 세게에서 중국하고 우리나라밖에 없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만들기 시작했고 유럽은 18세기 이후에서야 독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려청자와 분청사기를 거쳐 조선 백자 문화를 탄생시켰던 우리나라의 위대한 도자 문화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
가마의 불이 꺼짐으로서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마리 시내로 돌아오니 점심 무렵이 되었다.
우리나라 도처에 한우가 유명한 것처럼 일본도 도처에 "규(牛)"가 유명한 모양이다. 
여행지도에는 이마리규에 대한 안내가 나와있었다.
이마리역 근처의  "쓰지가와(

 

 

 



이마리가와 강에는 행운을 부르는 다리가 3개 - 아이오바시, 엔메이바시, 사이와이바시 - 가 있다.
아이오이바시(相生橋)는 부부나 연인이
함께 건너면 사이가 좋아진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다리를 걸어서 왕복했다.

상생교 주변은 17,18세기경 유럽으로 수출하던 포구가 있던 자리다.
일본의 도자기는 물론 도자기를 포장하는 데 쓰였던 포장지까지 

 


상생교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이마리 강물을 바라보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도 그 시절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있었는데 세월은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서양과 동양을 잇는 네델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까지만 오고 우리나라엔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이 표착해왔을 뿐이니 말이다. 안에서도 문을 열고 나가지 않았고, 밖에서도
우리의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의 지정학적 운세였고 조선 왕조의 무능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지난날의 과오나 운세 같은 것은 잊어버릴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현해탄을 박차고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으로 나아가고 잇지 않은가. 그런 문화적 자신감이
있기에 나는 의연히 상생교에 서서 '그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지'라며 덤덤히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상생교 이마리 포구가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뛰어남을 자랑으로 삼으면서 세계 도자 시장에서 뒤처져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억울할 따름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우리 도자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먼저 우리 도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고 사용해야 한다. 연구하고 개발할 것도 없다. 그 잠재된 DNA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마리강을 벗어나 동중국해를 향해 태평양으로 떠나는 배를 보면서
나의 그런 생각이 '나부의 꿈'처럼 허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했다.
                                                    -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중에서 -

유홍준의 안타까움엔 같은 마음이면서도 그의 낙관적인 기대감과 자신감엔 솔직히 쉽게 머리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잠재된 DNA'를 찾는 것이 말처럼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문제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우리의 자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단순히 도자기 이외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음을 우리의 혼수 문화만
돌아보면 쉽게 알게 된다. 여행자의 입장에선 경기도 이천과 광주를 돌아봤을 때와 아리타와 이마리를 보았을 때
느끼는 어떤 격차는 즉물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그걸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눈부신 성취와 전통의 역사만큼
실패와 단절의 역사를 우리는 냉철하게 곱씹으며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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