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성적이 57등인 학생이 있다.
평소에는 그의 성적이나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식구들이
이번 시험에선 16등을 해야한다고 무조건 다그치면 그 학생은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가 시험에서 겨루어야 하는 대상이 1등, 15등, 24등을 하는 학생이라면.
그를 가르치는 교사에게도 '닥치고 16등'이라는 임무를 둘러씌우고
그에 못 들면 온갖 '신상까지 털어'대며 그를 교단에서 끌어 내린다.
4년마다 한번씩 우리 사회에 생겨나는 '극성 학부모'들의 모습이다.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피파랭킹 57위의 한국은 1위인 독일, 15위인 멕시코, 24위인 스웨덴과 F조에 속해 험난한 예선전을 치뤄야 한다.
대다수의 외신은 한국의 16강 탈락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골드만삭스라는 대형 투자 은행이 인공지능의 기계 학습 방식을 통해 팀과 선수의 정보를
종합하여 100만번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한국의 16강 진출 확률은 20%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구태여 그런 첨단 기법에 의지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객관적으로 우리가 이길 상대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공이 아무리 둥글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도 그놈의 '16강 타령'이 또 극성이다.
'못 이길 상대는 없다'느니 '뒤집어버리라'느니 하는 광고와 기사가 넘쳐난다.
심지어 아무도 우릴 특별히 경계하지 않기에 사고치기 좋다는 기상천외한 논리의 기사까지 나온다.
이성을 가장한 논리도 있다.
'지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달라'느니 '최선을 다하면 국민들은 감동한다'느니 하는 식의.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플레이를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고
월드컵 마당에서 동네 마실 나오듯 뒷짐 지고 어슬렁거릴 선수는 없을 거라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근거 없는 기대치가 그렇게 높은 한
지난 몇년 간의 경험으로 사람들의 감동을 받으며 패한 경기에는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청율이나 조횟수를 높여 어떤 부차적인 이익을 노리는 방송이나 기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치더라도 거기에 덩달아 흥분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평소에는 텅 빈 국내 축구 경기의 관중석에서 보듯 별다른 관심도 없으면서 말이다.
축구 전문가가 아닌 팬의 입장에선 32개 팀이 겨루는 세계대회에 출전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적어도 손에 땀 나는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는 3경기 270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가.
결과에 대한 과욕으로 4년마다 한번 오는 축제의 시간을 탄식이나 분노로 망칠 필요가 없다.
출전만으로 우리는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은 어떤 상황도 보너스일 뿐이다.
이미 충분히 행복해진 마음으로 치맥을 준비해두고
선수들의 투혼과 행운과 16강 진출을 기원해보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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