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기와집
배봉기씨는 1914년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실종과 가난을 겪으며 힘들게 성장하였다.
결혼 생활마저 실패하여 떠돌던 중 '과일이 지천이라 나무 밑에 누워 입만 벌리면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위안부 '업자'의 말에 속아 1944년 열차에 올라 오키나와의 토카시키섬(渡嘉敷島)으로 끌려왔다.
섬의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씨는 '아키코'로 불리며 다른 7명의 조선인 위안부와 함께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다.
모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운좋게 살아남았고 마침내 조국이 해방되었다지만 명분상으로는 '황국신민'이던 배봉기씨는
오키나와의 폐허에 내던져졌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 어떤 땅인지 모르는 데다 먹고 살기 위한
어떤 대책도 없이, 토박이들조차 하루하루를 살기 힘들던 패전 직후의 오키나와를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이번엔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배봉기씨는 강제 추방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체류허가를 내준다는 조치가 있자 배봉기씨는 그것을 신청했다.
신병 치료를 위해 최소한의 도움을 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 노예' 최초의 증언이 된 것이다.
배봉기씨는 한 평 정도의 크기에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의 오두막에서 수도도 가스도 없이 살았다.
방바닥은 지면에서 30센티미터 정도여서 큰비나 태풍이 올 때는 물이 방바닥을 위협하며 아슬아슬하게 올라올 정도였다.
매우 더운 오키나와의 여름에도 문을 꼭 닫고 옹이구멍과 모든 틈새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얇은 판자벽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배봉기씨는 사람을 피해 살았다. 견디기 어려운 두통에 시달릴 때면 문득문득 가위로 자신의 목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자기 인생을 저주했다. 배봉기씨는 1991 10월에 오키나와 나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치 들개 사냥처럼 마구잡이로 잡혀 고향을 떠난 여자들의 행방이 가족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위안부로 전쟁터에 투입된 여자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도 없다.
하물며 전쟁터로 보내진 여자들 가운데 몇 만 명이 살아남고 몇 만 명이 죽었는지는 오리무중 상태다."
이상은 일본인 작가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가 10년에 걸친 배봉기 할머니의 구술 증언을 정리하여 펴낸 책
『빨간 기와집』을 근거로 한 것이다.
묻고 싶다.
배봉기씨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조국에게 배봉기씨는 어떤 존재인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힘없는 여성에게까지 참혹한 희생을 강요하면서 지키거나 이룩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종전 후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사죄나 배상은커녕 배봉기씨'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의 오만과 야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들에게 전쟁이 끝나기나 한 것일까?
그리고 일본의 그런 태도에 배봉기씨'들'의 조국은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일까?
날씨 때문에 토카시키섬의 배봉기씨'들'을 위한 "아리랑위령비"는 가보지 못했다.
섬주민들의 모금으로 세운 위령비라고 하니 뜻밖이면서도 의미가 깊다.
배봉기씨와 또 다른 배봉기씨'들'의 명복을 빈다.
비극의 토카시키섬
*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오키나와전의 기억과 그림전 - 희생)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3월26일 시작해 같은 해 6월23일 끝났다.
미군의 본토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 '전쟁을 이 섬으로 끌여들인 것이다.'
그 결과 8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8만 명이 넘는(20만이라는 말도?) 일본군과 미군이 죽었다.
오키나와인은 민간인 9만4천명을 포함 무려 1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가 60만명이었다고 하니 5명 가운데 1명이 전쟁 중에 숨진 것이다.
전쟁의 광풍은 배봉기씨가 끌려온 토키시키섬도 휩쓸었다. 토카시키섬은 오키나와 나하에서 서쪽으로
약 40km에 떨어진 케라마제도(慶良間諸島)에서 가장 큰 섬이지만 면적은 15제곱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위의 책 『빨간 기와집』 중에서 1945년 3월28일 토카시키섬 주민 약300명의 자살에 대한 끔찍한 증언이 나온다.
자살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의 거짓 선전과 적극적인 강요에 의한 '타살'이라고 해야 옳다. 자살용
수류탄은 군인들이 나누어주었다. 불발이 되어 죽지 못하면 가장인 남편이나 아버지가 다른 도구로 자신의 가족을
직접 죽였다. 미군에 사로 잡혔을 때의 고통을 막아주려 한 것이다.
모두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어요. '우리의 시체를 넘어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고도 했어요. 적이 300미터 앞까지
접근했다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비참한 마음으로 죽기보다 자기들은 훌륭한
일본 정신을 갖고 죽는다고 생각하고 싶었겠지요. 포로가 되면 온갖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죽인다고 세뇌받았으니까요.
아기를 드럼통에 넣어 태운다느니, 여자는 강간하고 나서 태워 버린다느니······. 일본군도 지나(중국 본토)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데 낫겠다 싶었고, 죽은 사람을 봐도 불쌍하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살아서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167쪽)
수류탄으로 자결한 사람, 수류탄이 터지지 않자 갖고 있던 톱이나 쇠스랑·칼 등을 사용한 사람, 그것조차 없어 나무토막
으로 서로를 때린 사람, A고지에서 날아온 박격포를 맞고 폭사한 사람 등 그리 넓지도 않은 계곡 기슭에 약 300명의
시체가 첩첩이 쌓여 있었다. (171쪽)
우에치 가즈부미(上地一史)의 『오키나와 전쟁사』(
관한 언급이 있다. 그에 따르면 본토에서 온 일본인 군대가 살아남기 위해 "부대는 지금부터 미군에 맞서 장기전에 돌입한다.
따라서 주민은 부대 행동을 방해하지 말고 식량 제공을 위해 깨끗이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이 비극을 충절어린 '옥쇄'(玉砕:ぎょくさい)로 미화하거나 아니면 역사에서 지우려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하물며 당시 징용노동자와 위안부로 끌려와 희생된, 정확한 집계 조차도 불가한 추정 인원 1만 명 이상의 한국인 희생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3곳에 한국인 위령비가 있을 뿐이다.
오키나와를 미군에게 내준 후 일본은 미군이 본토 상륙을 위해 제주도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제주도에 무려 6만5천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미군과의 또 다른 전쟁을 대비했다.
천만다행히도 일본은 항복하였고 제주도는 오키나와와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오키나와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국제적인 복잡한 문제에 얽혀 있다.
일본 국토 면적의 0.6%밖에 안 되는 오키나와에는 주일 미군 전용 시설의 74%가 집중되어 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지만 군력을 쥔 외세와 일본 본토의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오키나와의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정찰기와 전투기의 항적은 한반도 상황이 긴박해질 때마다 자주 뉴스에 나온다.
중국과의 영토 분쟁(정치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 열도는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오키나와 현에 속한다.
오키나와는 이웃나라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웃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스민 곳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은 상처이기 때문이다. 상처는 어느 곳이건 아픈 것이다.
그리고 외부를 보는 시각은 우리 사회 내부를 보는 시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한쪽은 거의 언제나 아수라장이다. 아수라장을 만들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전쟁과
자본의 폭력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한심한 권력자들에게 배낭을 들려주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당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지도 한 장을 들고 다녀와보라고, 가난한 여행을 보내고 싶어진다.
자기의 땅 바깥에, 자기 집 바깥에 무수한 집들이 있음을, 그 집의 주인들이 누구나 자신처럼 자기의 집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왜 모를까. 같은 맥락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거리에서도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총알이 꿰뜷고 간 테이블 위로 결혼식 축가가 울려 퍼질 수도 있는 이 질기디질긴 산 자들의 생명력을 그들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의아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위로하며 기어코는 상처를 치유하는 쪽으로
움직여간다는 이 기막힌 진실을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살고자 하는 모든 목숨 가진 존재의 눈물겨운 유대와 연대의
끈질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이 별의 도처에서 여전한 폭력의 전횡들이 얼마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공상하기도 한다.
- 김선우의 『김선우의 사물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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