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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2018년의 책 - 황석영의 『수인囚人』

by 장돌뱅이. 2018. 12. 31.




이 책은 소설가 황석영의 개인사이자 그대로 그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일을 감당해 내고 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폭넓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소설가의 숙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소설로 풀어내지 않았다면 그 엄청난 경험들을 어떻게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작가로서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한 꿈과 치열한 소명 의식으로 현실의 금기를 넘어섰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개인의 고통을 벼리고 다듬어 빛나는 예술로 우리 사회에 돌려주었다.
개인적인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 살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열정과 희생에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 대 어느 날 창비 영인본에서 그의 소설 「객지」와 「한씨연대기」를 접한 이래
그의 모든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 독서 기억 속에서 '올해의 책'이 되었다.
『수인』 또한 그렇다. 책 속의 인상적인 몇 대목을 옮겨본다.


  미지의 것 때문에 금기의 억압이 있다면 작가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것을 위반하고라도 확인해야만 한다.
국경, 장벽, 철조망 너머로 날아오고 날아가는 철새들을 본 적이 있다면 생명의 본성과 사람이 정해놓은 잡다한
규정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게 될 것이다.


 군인들이 노관 안을 손전등으로 비춰 보더니 모두 나오라며 불빛을 흔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 누나들 손목을 잡고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나는 아버지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데 그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군인들 중에서 지휘자인 듯한 사람이 나서더니 물었다. "당신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승만 박사인가, 김일성 장군인가?"
아무도 감히 대답하는 이가 없는데 누군가 김장군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대뜸 다른 군인이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지휘자가 말했다. "모두 갈겨버려!
" 그러고는 총알을 재는 철커덕, 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다. 그 순간의 얘기는 나중에 어머니가 몇 번이나 말해서 너무도 또렷하다.
"우리는 정치를 모르는 양민들입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마술처럼 그들은 뭔가 일장 연설을 하고는 모두들 다시 들어가라고 하더니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사라졌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
囚人'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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