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보름날.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던지 아침에 커튼을 걷자 이미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와! 눈이다!"
올 겨울엔 눈이 드물었던지라 유난히 반가운 눈이었다.
눈이 부추겼을까? 왠지 어딘가로 나들이를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싱숭생숭 안절부절 부산을 떨어보기도 했다.
오후부터 개이기 시작한 하늘엔 밤이 되자 선명한 보름달이 동그랗게 떠올랐다.
아내와 창밖을 내다보며 또 소리쳤다.
"와! 달이다.!"
눈이 내린다
기차가 미끄러지듯 달려간 자리에
눈은
아버지처럼 기침을 한다
차창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오랜 만남처럼 다정하고
눈은 들녘, 어디서나 손을 흔든다
이별이 기다리는 간이역 같아서
눈에 익다
시렁에서 식어가는 감자 몇 알과
푸른 달빛이 감도는
그런
눈오는 날이다
-손상렬의 시, 「눈 오는 날, 길을 나서다」 -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딸네집에서 오곡밥과 나물로 대보름을 앞당겨 쇠었다.
이런저런 일들에 피곤까지 쌓여 여느 해보다 단출하게 차린 보름음식이었다.
그래도 부럼에 귀밝이술까지 곁들여 나름 구색은 갖추었다.
어릴 적부터 난 설날보다 대보름을 좋아했다.
세뱃돈이 생기는 설이 싫지는 않았지만 평소 그다지 가깝지 않아 어렵기만한 어른들을 찾아가
지극히 형식적인 문답을 주고받는 시간이 좀이 쑤시거나 고역이었다. 그보다는 쥐불놀이나 달집태우기,
연을 날려보내는 등의 다채로움이 있는 보름이 훨씬 재미있었다.
요즈음은 시도 때도 없이 연을 날리지만 예전에는 설날부터 보름까지만 연을 날렸다.
연에 액(厄)’자나 ‘송액(送厄)’이라는 글을 써서 먼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한해의 나쁜 기운을 실어보낸다는 의미라고 했다.
한번인가 보름이 지난 들녘에 떨어진 커다란 방패연이 탐이나 집에 들고 왔다가
남이 버린 액을 가져왔다고 집안 어른들의 질겁 섞인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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