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신입생 시절까지 순수한 감성과 맑은 서정을 자극하는 달달한(?) 내용의 책들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어린왕자』나 『인간의 대지』 등의 쌩텍쥐베리나 헤르만 헷세의 소설을 비롯하여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전혜린의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등등.
『달과 6펜스』도 아마 그 무렵에 읽었을 것이다.
런던의 증권 거래소에 다니던 평범한 중년의 가장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맨몸으로 집을 나간다.
수입 좋은 직장과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을 한 순간에 버린 것이다. 직장이나 가족들과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남겨진 아내와 아이를 위한 어떤 생계 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았다. 그냥 집을 나가 파리로, 파리에서 생활하다
종국에는 남태평양의 섬까지 간다.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던가,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난 그려야 해요." 오직 그것이 이유였다.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와」와 「광화사」를 자주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작곡가로서 혹은 화가로서 영감을 얻거나 완성을 하기 위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는 파격을 집어 넣은 탐미적 소설 .
거기에 비하면 스트릭랜드의 가출은 강도가 좀 약했던가? 아니면 파격에 대한 앞선 학습효과였던가?
『달과 6펜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김동인의 두 소설이 그랬듯 커다란 울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제목 중의 "달은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하고
6펜스는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의 값으로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 정신과 물질, 본성과 세속을 나누고 전자에게 우월적인 비중을 두는 듯한 도식은
아직 대학 새내기의 설익은 감성과 이해력으로도 좀 밋밋해 보였던 것 같다.
순수한 열정과 해맑은 서정은 가슴에 스며들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정서이지만
'천박한 세속적 가치'까지 포용하여 그속에서 뒹굴고 인내하며 뿌리내리고 성장하지 않는 한
그것은 다분히 관념적 유희이지 진정한 삶의 정서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백수가 되면 직장생활을 핑계로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무진장 많을 것 같았다.
우선은 여행도 독서도 많이 하고 기타도 배우고 요리도 배워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행도 독서도 직장 생활 할 때 보다 더 많이 하는 것 같지 않고 기타는 사다 두고 손에 잡아 보지도 않았다.
요리는 몇 가지 손에 익은 것만을 주기적으로 되풀이 하며 향상된 진도를 못 내고 있다.
여전히 핑계는 있다. 정기적으로 손자 친구와 놀아야 하고 집안에 우환도 있고 등등.
하지만 솔직한 고백이 먼저다.
'나는 '무엇'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절실한 어떤 것을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고.
올해는 서울시에서 하는 주2회 출근의 일자리에도 나가 보고 허울만 좋은 시민기자란 것도 해봤다.
관광통역이라는 목표 아래 공짜로 시켜주는 인도네시아어 학습도 받았다.
고령화 시대를 위해 나라 예산도 많이 배정된 탓인지 그와 관련된 '실버 비즈니스'만 제철인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선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려면 뭔가를 준비하고 실천에 옮겨야한다고 아우성들이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니면 달리기를 하고 손자와 노는 것은 그 '무엇'을 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문득 절실한 무엇에 끌려 과감한 행동으로 자신을 몰아간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다시 읽어도 찰스 스트릭랜드의 결단과 가출의 의미엔 여전히 그다지 공감이 되진 않지만
덕분에 '무엇'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야기의 전개가 추리소설처럼 흥미로워 단숨에 읽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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