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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다시 읽다 - 『분노의 포도』

by 장돌뱅이. 2018. 12. 26.

『분노의 포도』는 70년 대 후반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선배가 내게 권한 책이다.
존스타인벡이 누구냐고 묻자 선배는 영화 "에덴의 동쪽"의 원작자라고 했다.
"제임스딘이 나온 그 에덴의 동쪽?"
내가 되묻자 그렇다고 했다.
유명 영화를 거론해서 철 모르고 깝치던 대학 새내기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땐 솔직히 작가 존스타인백은 모르고 요절한 주연 배우 제임스딘만을 알고 있었다.

선배는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했다.
'대학생이라면'이라고 할 때 뒷말은 흔히 사회적인 의식이나 책임감에 대한 당연과 의무로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읽어 본 『분노의 포도』는 미국의 자본과 제도가 만들어내는 가난을 충격적으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어 주고 위로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도 따뜻하게 보여주었다.

소설은 경제 대공황에 이어 한발과 모래 폭풍으로 피폐해진 1930년 대 미국 중부 농촌이 배경이었다. 은행에서 빌린 농사 자금을 갚을 길이 없는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난민이 되어 꿈의 땅 캘리포니아로 고난의 이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도 그들이 꿈꾸던 약속의 땅은 아니었다.

무려 40여 년만에 다시 『분노의 포도』를 읽으며 자본의 위력이 거세진 요즈음의 우리 사회를 더욱 실감나게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지주가 은행이나 금융회사인 경우, 지주의 대리인은 그 은행이나 금융회사가 그 땅을 필요로 한다, 원한다,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마치 은행이나 회사가 생각과 감정이 있는 괴물이고 자신은 그 괴물에게 먹혀 버린 것처럼. 대리인들은 은행이나 회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하이고 노예이므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주인은 바로 은행이었다.

은행이나 회사는 (중략) 공기를 호흡하지도 않고 고기를 먹지도 않거든요. 그놈들은 이윤이 있어야 숨을 쉰단 말입니다. 밥 대신 이자를 먹고살아요. 공기가 없거나 고기가 없을 때 당신들이 죽는 것처럼, 그놈들도 이윤을 얻지 못하면 죽어요.

"하인즈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3만 에이커쯤 되는 땅에 복숭아하고 포도를 기르고, 통조림 공장이랑 와인 양조장도 갖고 있었다네. 그놈은 항상 '망할 놈의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
'망할 놈의 빨갱이들이 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가 이 빨갱이 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때 여기 서부로 온 지 얼마 안 된 젊은이가 하나 있었네. (중략) '하인즈 씨,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데요, 그 망할 놈의 빨갱이라는 게 뭐죠?'
그랬더니 하인즈가 대답을 했지.
'우리가 시간당 25센트를 주겠다고 할 때 30센트를 달라고 하는 개자식들이 다 빨갱이야!'
이 젊은 친구는 그 말을 좀 생각해 보다가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
'세상에, 하인즈 씨, 전 개자식이 아니지만 만약 빨갱이가 그런 거라면 저도 시간당 30센트를 받고 싶은걸요. 다들 그래요. 하인즈 씨, 그럼 우리는 전부 빨갱이예요.'"

기업들, 은행들도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농사는 잘되었지만 굶주린 사람들은 도로로 나섰다. (중략) 대기업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어쩌면 품삯으로 지불할 수도 있었을 돈을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는 데,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훈련하는 데 썼다. 고속도로에서 사람들은 개미처럼 움직이며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 신입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나를 뭉클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이라는······.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놈들이 널 죽여도 내가 모를 텐데. 놈들이 널 해칠 수도 있는데.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톰이 불편한 웃음을 터뜨렸다.
"(중략)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 톰?"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죠.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중략) 사람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러 댈 때도 제가 있을 테고, 배고픈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릴 때도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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