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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15 - 박정만의 「작은 연가(戀歌)」

by 장돌뱅이. 2019. 6. 15.

금요일 저녁.
백수에게 주말과 주중이 다를 리 없건만 한결 마음이 느긋해진다.
아직 '직장물'을 미처 못 씻어냈다는 뜻인가.

서쪽 노을이 붉다.
바람도 선선하여 앞뒤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고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저녁은 준비할 게 크게 없다. 조리공부 시간에 만들어 싸가지고 온 음식을 데우면 된다.
오미자소스 돼지갈비찜과 쭈꾸미미나리무침, 그리고 새송이버섯장조림.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등 뒤 식탁에 앉아 낮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친구의 딸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부모의 은근한 염려를 받더니
드디어 짝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이 다 스노우보드 매니아라 신혼여행도 미루었다가 우리나라가
한 여름
일 때 보드를 타러 지구 남반부로 간다고.  
젊은 세대답다는데 아내와 동의한다.

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대거리를 한다.
"오늘 조리수업이 끝나고 한강다리를 건너오는 버스 안에서 아차!하며 머리를 쥐어박았지.
쭈꾸미 무침 재료를 싼 비닐봉지를 교육장에 넣어두고 온 게 문득 생각나잖아.
돌아갈까 잠시 망설이다 이마트에서 사려고 그냥 왔는데, 태국과 베트남산밖에 없더라구.
사버릴까 만지작거리다 포기하고 집에 있는 문어로 대신하는 중이야."

아내는 내 말에 장난을 더한다. 
"이렇게 성의없이 하면 곤란하지. 문어 보다 갑자기 쭈꾸미가 더 먹고 싶네. 아 쭈꾸미 쭈꾸미!"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아내와 식사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한 가지 음식에 대한 아내의 품평을 받는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이다.
육식보다는 채식 선호의  아내는 예상대로 새송이버섯장조림에 최고점을 준다. 
딸아이네도 만들어주자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딸과 아내는 점점 더 가까운 친구가 되어간다.

'짝퉁 쭈꾸미무침'인 문어무침도 좋다고 한다. 소스가 압권이라고.
나는 양념장에 우리가 생각지 못하던 멸치액젓을 넣는다고 알려준다.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태국음식을 위해 이젠 태국에서 '남쁠라'를 사올 필요가 없다고,
우리의 멸치액젓을 먹으면 된다고, 그게 더 낫다고,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비결처럼 덧붙인다.

돼지갈비찜도 약간의 돼지고기 냄새가 나지만 그런대로 좋다고 한다.
돼지고기 냄새 때문에 돼지고기가 싫다는 아내와 바로 그 냄새 때문에 돼지고기가 좋다는 나.
(이 문제에 있어선 딸아이도 내 편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고기나 양고기가 아닌 바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 아니냐고 둘 사이 해묵은 논쟁?을 시작해 본다. 

특별히 감정을 절제하거나 고조시킬 필요가 없는, 다음 말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는 일상의 대화를
편안히
주고받는 시간이 그윽하고 유쾌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겠지만,
그런 시간들이 많을수록 삶이건강하고 풍요로워지는 것 아닐까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 젊은 시절 아내에게 받은 첫 편지.
텔레비젼에 나오는 아내와 걸었던 여행지. 그곳에서 보던 별빛. 파란 하늘. 흰 구름.
맑은 개울물 위에 떠내려 가던 빨간 단풍.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났을 때의 개운함.
모처럼 만든 파전이 고소해서 예정에 없던 막걸리를 사러 갈 때의 발걸음.
문앞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는 손자친구  등등의 시간.
 
세상에 대한 거대 담론을 도외시한 일상에의 집착은 허망한 것이지만
평온한 일상을 담보해내지 못하는 거대 담론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대한 가치와 당위를 담아내고 평가하고 끝내 넘어서야 하는 것은
결국
아내와 나의 시시하고 자잘한 일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처음과 끝, 모든 과정의 매 순간에 있는 사랑!,
일상이 고뇌와 권태의 늪일지라도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는 생명인,
서로의 심장에 심장을 잇대어 출렁이는 물길로 이어지는,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 사랑!

신이여 부디 이런 일상과 사랑을 내게 오래 허락하소서! 


사랑아,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 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새송이버섯장조림


*쭈꾸미무침 아닌 문어무침


*오미자소스 돼지갈비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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