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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그대의 관대한 사랑

by 장돌뱅이. 2019. 6. 13.

사람은 먹어야 산다. 너무도 당연하다. 일용하는 음식의 기본은 식재료이다.
따라서 이들 생장의 바탕인 자연에 대한 이해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필수 항목이 되겠다.
서울먹거리창업센터에서 자연순환과 발효퇴비, 그리고 흙을 살리는 농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생태맹이라는 단어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무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생태맹은 단순히

자연 생태에 대한 지식 결핍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 결핍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즉 자연의 중요성과 신비함, 아름다움, 오묘함을 느끼지 못하는 감성의 결핍 상태를 말한다.
흙을 살리는 농사와 같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태맹의 일상을 사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강의 중과 후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


1. 언제 피었다 지는 지를 모르는 그 꽃들


딸아이 초등학교 시절, 일주일마다 한번씩 논을 보러다닌 적이 있다.
환경과 먹거리를 주제로 한 딸아이의 과제물을 위해 벼의 성장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기 위함이었다.
모내기가 끝난 직 후의 앙증맞던 어린 벼는 찾아갈 때마다 눈에 띄게 쑥쑥 자라 있었고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무성한 초록으로 논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벼도 꽃이 핀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계절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에는 감탄을 하면서도 정작 벼의 꽃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일용하는 양식이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은 나의 생태맹 속성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이럴 때  "벼꽃이나 옥수수, 혹은 콩꽃이나 감자꽃처럼
언제 피었다 지는 지를 모르는
그 꽃들만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한 시인의 말은 묵직한 잠언으로 다가온다.


2. 논은 '쌀공장'이 아니다.
쌀은 우리의 주식이다. 쌀은 영양학적 분석이나 경제학적 비교우위로만 가치를 논할 '제품'이 아니라
우리의 핏줄과도 같은 '소울푸드'이다.
쌀의 고향이라 할 논도 공시지가나 개발효율성으로만 그 가치를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논은 노동의 현장이자 우리의 정서와 문화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논은 또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오는 조류 중 오리류, 기러기류, 두루미류, 맹금류 등 7과 22종 이상이 농경지를 이용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양서류, 어류, 파충류 등의 서식지로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
논에서는 벼가 자라는 동안 1ha당 8.8톤의 산소를 발생시켜 공기를 정화한다.
또한 경사지에 쌓은 논둑은 토양이 유실되는 것도 막아준다.
논은 소양강 댐의 저수량과 맞먹는 연간 26.2억톤의 물을 담을 수 있어 홍수 조절에도 도움을 준다.
증발하는 논물은 더운 여름철 여름철 대기 온도를  낮추기도 한다.

논을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만 볼 때 다양한 생명체들과 그들의 생존을 감싸안는 논의 베품은
설 곳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 위험은 인간이란 '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논과 농촌과 농업을 살려야 할 이유이다.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의 시, 「나무에 깃들여」-


*위 사진 : 김제 만경평야의 논


*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의 계단식논


*인도네시아 발리의 계단식논(RICE TERRACE)


3. 자연을 꿈꾸는 뒷간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의무는 "똥을 싸서 땅을 기름지게 만들라"는 것이라는 안철환선생님의 강의는 유쾌했다. 
전라남도 승주 선암사의 유명한 "자연을 꿈꾸는 뒷간"( https://jangdolbange.tistory.com/367 )을 떠올렸다.
"사람이 제 똥 먹지 않으면 삼년을 버틸 수 없다” 고 우리 조상들은 믿었다.


4. 자운영(英)의 '관대한 사랑'
오래 전 전남 함평을 여행하면서 자운영 군락을 만난 적이 있다.
아내와 아름다운 '보랏빛 구름()'이 아스라히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몽환적인 눈 호강이었다.




자운영은
콩과 속한 두해살이풀로 4~5월에 붉은 자주색 핀다.
꽃이 피기 전의 잎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자운영이 입 호강도 시켜주는 것이다.
자운영은 또 죽어 땅의 지력을 높이는 녹비작물이다. 버릴 것  하나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누가 붙였을까? 자운영의 꽃말은 '그대의 관대한 사랑'이란다.

 
자운영은 꽃이 만발했을 때 갈아엎는다
붉은 꽃이며 푸른 잎 싹쓸이하여 땅에 묻는다
저걸 어쩌나 저걸 어쩌나 당신이 탄식할지라도
그건 농부의 야만이 아니라 꽃의 자비다
꽃 피워서 꿀벌에게 모두 공양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자운영은 땅에 묻혀
땅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인연이 된다
그래서 자운영을 '녹비'라고 부른다는 것
나는 은현리 농부에게서 배웠다, 녹비
나는 아름다운 말 하나를 꽃에게서 배웠다
그 땅 위에 지금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 정일천의 시, 녹비(綠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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