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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 - 선암사에서 굴목이재를 넘다1

by 장돌뱅이. 2012. 7. 2.

<여행시기 2004년 봄>

<야간열차를 타고>


초등학교 시절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타고 행주산성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아마 부모님이 아닌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첫 번째 기차여행
이었을 것이다.
조바심을 치며 기다린 끝에 마침내 기차가 역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의 설레임과 흥분은
당시로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짜릿한 감정이었다. 

기차여행은 50대 초반인 아내와 나의 세대가 지닌 여행의 어떤 원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때문인지 아내와 오래간만에 남도여행을 위해 순천행
열차에 오르면서 “그래 역시 여행은 기차로 해야지!” 라고 말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새마을호에 이어 기차 서열(?) 2위를 지키다 이제는 고속철도라는 첨단의 기종에 또 한 계단
더 밀려났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궁화호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좀더 가까워진 모습으로 역구내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퇴색해가는 유년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아쉬우면서도 따사롭다.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세월의 무게에 눌린 나약함이 아니라 덧없이
잊혀져가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적극적인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현실을 이겨내는 끈끈한 힘과 지혜가 스민 메아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E.H.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다면 개인에 있어
저마다의 추억도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의 시, 「사평역(沙平驛)에서」중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 아내와 나도 그 ‘단풍잎’ 같은 차창에 기대어 힘들었거나 행복했던
지난 어느 시절을 이제는 다 ‘설원’처럼
포근해 보이는 한 가지 색감으로 회상하며 남쪽으로 흘러갔다.


<선암사의 아침>

*위 사진 : 선암사로 들어가는 길목


이른 새벽 순천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택시를 대절하여 또 얼마쯤을 달려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였는데도
어둠은 아직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봄이지만 아직 새벽의 기온은 냉랭하여 추운 정도가 마치 한 겨울을 방불케 했다.
아내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아내의 모습에 나는 불이 켜져 있는 한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새벽밥을 짓던 주인 아낙네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내다보았다.

나는 장사집에 이른 아침에 하는 부탁으론 다소 뻔뻔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잠시 몸 좀 녹이다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낙은 귀찮은 내색 없이
선선히 그러라고 하며 청하지도 않은 커피까지 타다 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하자 야간열차에 시달린 찌뿌듯한 기운과 으슬으슬한 추위가 한결 나아졌다.
커피값을 지불하려 하니 한사코
받지 않았다. 선암사를 둘러보고 다시 이리로 내려올 것이 아니라 굴목이재를
넘어 송광사로 갈 참이라 호의를 갚을 길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한 잔이 뭐라고 돈을 받는 답디여.”

늘 넉넉한 모습으로 거기 그렇게 있는 지리산이나 무등산 같은 남도의 산천이 남도 사람들을 닮은 것인지
남도 사람들이 남도의 산천을 닮은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적 계산법에 익숙한 아내와 내게 이른 새벽에 만난
남도의
인심은 고향처럼 훈훈한 것이었다. 

아직 문이 잠긴 매표소 앞의 가로등을 지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길은 달빛에 하얗게
드러났다.
그 위로 수묵화 같은 나무 그림자들이 길을 가로 막고 누워 있었다.

숲 속에서 계곡물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가끔씩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아내와 나는 발걸음을 최대한 아껴가며 걸었다.
산사로 들어서는
길이라서인지 새벽 예불을 드리러 가는 수도승처럼 정신이 맑아오는 느낌이었다. 

선암사에 도착하자 어둠은 짙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동쪽 하늘로 점차 동이 터오면서 고여 있던 어둠은 서서히 엷어져 갔다.
그러자 선암사의 경내는 절마당을 쓰는 스님들의 빗자루질 소리가 가득했다.
아내와 나는 절간 처마 아래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싸락 싸락 싸락.
경쾌한
소리를 내며 스님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참빗으로 빗어 내린 어머니의
머릿결처럼 정갈한 빗자루 자국이 길게 생겨나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는 선암사의 경내는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일주문과 종각을 지나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과 만세루가
절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고
그 뒤로 한 단이 높여진 축대 위에는 불조전,
팔상전, 원통전, 장경각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응진전, 달마전, 진영당,
미타전, 산신각 등 20여동의 건물이 있다. 

*위 사진 : 선암사에 화재가 빈번하자 심검당의 환기창에 물과 관련한 글자를 투각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건물들의 내력과 건축양식의 특징 등의 각론으로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축대와 화단 그리고 담장 밖의 차밭과 전나무 숲 등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총론적인 아름다움에 있다.

인공적인 건물이고 인공적인 축대와 화단이지만 세월의 손길은 마치 그것들이 태고적 부터 거기에 있는 양 다듬어 놓아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이야 말로 선암사의 아름다움의 본질이다. 

*위 사진 : 선암사의 부도밭. 절 분위기를 닮아서인지 수수하면서도 자연스런 멋이 있다.

선암사에는 우리나라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없었다.
종교적인 분규로 재산관리권이
해당 지역 관청인 순천시로 소속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산관리권이 관청에 있기 때문에 선암사 본연의 아름다움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은 세태의 아이러니다.
무슨 분규건 순리대로
타결되기를 바라지만 타결된 이후에도 선암사만큼은 아무쪼록 지금의  모습을 
보수, 유지하는
관리만 있었으면 좋겠다.  

*위 사진 : 선암사 뒷쪽의 사철 싱싱한 차밭

선암사는 또한 봄에 피어나는 곳곳의 다채로운 꽃들로 유명한데, 아내와 내가 들렸을 때는 그 절정을 지난 듯
대부분의 꽃들이 지고 여기저기 툭툭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나 연못 위를 하얗게 뒤덮인 벚꽃만이 끝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아내와 나에겐 감동스런 아름다움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도 절의 안팎을 몇 바퀴나 맴돌며 선암사를 쉬이 떠나지 못했다.


<자연을 꿈꾸는 뒷간>

선암사를 돌아보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해우소, 바로 화장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힌다고 한다.
이른바 ‘자유낙하식’ 형태의 재래식 뒷간이지만 깔끔하고 냄새도 없어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여느 절 건물인 줄로 알기 십상이다. 

이 선암사 해우소는 남자칸과 여자칸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고 중앙에 통로가 있는 내부 구조를 갖고 있다.
안쪽 벽면은 환기를 위해 살창의 면적을 크게
하였다. 인분을 한 곳으로 모아 솔잎이나 나뭇잎 등을 분료
위에 뿌려 숙성
시킨 뒤 일년에 한번씩 거름으로 쓰는 것이다.
선암사에서 경작하는 20여
마지기의 논밭은 바로 이곳에서 나오는 퇴비로 충분하다고 한다.

50년대 농촌 지역을 돌아보던 이승만 대통령은 밭에 뿌린 분뇨 냄새가 차창으로 스며들자 수행하던 장관에게
"저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 미개한 분뇨 대신에
화학비료를 쓰게 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 말은 5.16 군사정권의
'근대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분뇨는 점차 우리 농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화학비료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우리의 전통 농법은 그 대안의 하나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 듯 하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내가 그 농법의
장단점을 거론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식의 발상이 근거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나 철학적 근거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은 갖고 있다.

줄리 L 호란이란 서양인은 그의 저서 『1.5평의 문명사』에서 "문명이 문자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먼저 화장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배설물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배설물을 피해 세계 곳곳을
돌아
다니던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6세까지 런던이나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배설물의 처리는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볼일을 보고 그대로 창밖으로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의 글은 다소 비약이 심하다.


신을 향한 갈구와 기사도의 낭만이(?) 넘치던 중세의 유럽은 배설물 처리가 정말 심각한 사회 문제여서
각종 규제와 처벌을 강조하는 법률이 만들어졌음
에도 도로와 강물에 오물이 넘쳤다고 한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켰다는 중세의 대재앙인 흑사병도 그런 불결한 위생환경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화장실 형태인 수세식 화장실이다.
그러나 매우 위생적이고 깔끔해 보이는 배설물 처리 방법은 근원적인
해결이라기 보다는 회피의 측면이 강하다.
비록 이전과는 정도가 다르다할
지라도 기본적으로 배설물의 하천 투척이라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위 사진 : 선암사 해우소의 배부. 자연통풍으로 내부에는 대소변의 냄새가 전혀 고여 있지 않았다.

이에 비해 우리의 선조들은 배설물을 음식→똥→거름→음식이라는
생태적 고리의 하나로 인식했던 것 같다. 똥(糞)은 쌀(米)의 또 다른(異) 형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버리거나 포기할 없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사람이 제 똥 먹지 않으면 삼년을 버틸 수 없다”는 옛말이나 “흙이 똥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오곡이 풍성하게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수운 최제우 선생은 말에는 우리 선조들이
자연과 세상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와
뛰어난 지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도시적인 삶의 형태가 보편화된 요즈음, 전통적인 방식의 기계적인 적용은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도 선암사의 해우소가 실천하고 있는
자연친화적인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 시대의 삶의 형태가 지닌 걱정거리(憂)를
돌아보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보는(解) 계기로 삼을 필요는 있을 것이다.

고향에 가면 신기하게 설사가 멎는다
귀성길 꽉 막힌 도로가 뚫리듯 속이 개운해진다
장에 있던 신경세포가 진화해서
뇌가 되었다는 가설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내 장세포들이 정말 귀향한 걸 알고 있을까
온갖 염증에 시달리는 장세포들이 고향의 기억을 갖고 있을까
외양간 옆 땅속에 파묻은 항아리 위에
널빤지 두 장 달랑 걸쳐놓은 변소간에 앉아 있으려면
외양간의 소들이 여물 씹는 소리
송아지들이 어미의 젖을 쪽, 쪽, 달디달게 빨고 있는 소리
뒤란에서 시원하게 엉덩이를 닦아주고 가는 댓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처마끝으로 굵은 별똥들이 뚝뚝 떨어져내리면
땅속에 파묻어논 항아리처럼 별똥을 받아먹는 저 산과 들판
사람이 제 똥 먹지 않고 삼년을 살면 병들어 죽기 십상이다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상할머니 말씀
일년에 한두번 기를 쓰고 고향에 가는 건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장 없인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낯선 나를 경계하던 누렁이나 때까우가 다가와선
마침 저들과 같은 일을 치르고 있는 나를 보고
적이 안심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때도 바로 이때다
                                  - 손택수의 시, 「腸으로 생각한다」-


*"자연을 꿈꾸는 뒷간"이라는 소제목은 이동법이 지은 동일한 제목의 책에서 빌려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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